카톨릭 방송 칼럼 -사제의 눈- 2007년 12월 9일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며 주권을 침탈한 을사조약이 체결
되었을 때 오늘의 대통령 경호 실장격인 시종무관장으로 왕을 지키던 충정
공 민영환은 그의 나이 45세에 다음과 같은 짧디 짧은 그러나 너무도 비장
하고 가슴 아픈 유서를 남기고 자결 합니다.
“아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재에서 잔멸하리라.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
는 자는 살 수 있는 법인데 여러분은 왜 이것을 모르는가 영환은 한 번 죽음
으로써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 2000만 동포 형제에게 사과하노라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 여러분을 돕고자 하니 우리 이천만 동포형제들
은 천만배로 보답하여 마음을 굳게 먹고 학문에 힘쓰며 일심협력하여 우리
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면 죽은 몸도 저승에서 웃으리라. 아 실망하지. 말
라 우리 대한 제국 이천만 동포형제에게 이별을 고하노라.”
그가 남긴 유서입니다. 그의 자결이후 조병세, 홍만식 등의 우국지사들이
뒤를 이어 자결을 하며 주권을 잃었음을 슬퍼하며 나라를 지키고자 하였습
니다. 그리고 그의 자결 소식에 수없이 많은 조문객이 몰려오고 심지어 일
본 고관 관리들도 달려와 조의를 표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나라에서는 그
에게 충정공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의정대신을 추증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결한 8개월 후 피묻은 옷을 보관한 마루에서 청죽-푸르른
대나무-이 솟아올랐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또한 사람들은 그 대나무가 충
정공의 피를 먹고 자라난 대나무라 하여 “혈죽”이라고 불렀으며 수많은 사
람들이 그 대나무를 보기 위해서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 사건이 언
론에 보도되어 화제가 되었는데 1906년 7월 5일자 대한 매일신보(현 대한
매일)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의 집에 푸른 대나무가 자라났다. 생시에 입고 있었던 옷을 걸어두었던
협방 아래서 푸른 대나무가 홀연히 자라난 것이라 한다. 이 대나무는 선죽
과 같은 것이니 기이하다 또한 특이한 것은 충정공이 자결한 때가 45세였
는데 마치도 그의 삶을 대변하듯이 대나무의 잎 역시 45개였다는 것입니
다.
그렇게 혈죽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술렁이기 시작했고 이에 당황한 일제는
혈죽이 조작된 것처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나무가 뿌리를 통해 번식한다는 점을 주목, 집주변에 대
나무가 있는지 면밀히 조사하였고 심지어 마루를 뜯어내고 주위를 파내며
다른 대나무가 뿌리를 뻗어서 솟아난 것은 아닌지 조사했지만 그 역시 실패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제가 뽑아버린 대나무를 고이 수습한 충정공의 부인은 유서와 혈
죽을 내어 놓으라는 일본인들의 협박을 이겨내고 끝끝내 지켜 내어 광복이
후 다시금 세상에 알리게 되었고 지금은 유족들이 1962년 고려대 박물관
에 기증, 옮겨지게 됐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고려대 박물관에는 혈죽과 1906년 7월 15일 일본인 사진기사 기
쿠다가 촬영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필이면 대나무가 나지 못할 곳에서 대나무가 자랐고, 하필이면 대나무
잎이 45개였을까?
정말 그 당시 조선인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민충정공의
영혼이 못다한 조국의 푸르름에, 자신의 절개를 다시금 드러내고자 하였던
것일까요? 아니면 우연의 일치일까요? 아니면 일본인들이 주장하듯 충정
공을 추모하고 사랑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사건일까요?
그 진위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단지, 이왕이면 그 분의 애국심과 그 분의
푸르른 기개와 그 분의 뜨거운 조국애가 혈죽으로 다시 자라난 것이라고 믿
고 싶습니다.
이제 대통령 선거가 열흘 남았습니다.
열 둘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 나라를 구해 보겠노라고 나섰습니다. 물론
사퇴한 후보도 있습니다만 무슨 축구 클럽도 아니고 참 많기도 많습니다.
또한 제각기 경제를 살리겠다고 아우성들입니다. 자기가 아니면 경제가 안
된다고 나라가 망한다고 하나같이 우국지사요. 뜨거운 가슴을 안고 조국을
구하려 나선 애국지사들입니다.
과연 누가 새 시대를 이끌어 갈 대통령이 될지
비록 몸은 이역 만리 이 곳에
있지만 마음은 초조한 것이 아마도
저 역시 뜨거운 피로 호소하고 사라져간
민충정공의 사랑하는 이천만 동포의 후손중에 하나이기 때문이지 싶습니
다.
그런데 아쉽게도 저는 용기가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능력도 없는 사람입니
다. 저는 사실 그저 어떻게 나라가 잘 되어서 나라 덕 좀 보고 싶은 그저 국
력이 더 강하고 힘이 세어져 입국 심사할 때 대한민국 여권 하나로도 전 세
계 어디를 가서나 보호받고 싶은 보잘 것 없는 소시민중의 하나입니다. 그
런 소시민이기에 저는 나라를 위해, 민족을 위해 그저 큰 봉사도 노력도 하
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명색이 천주교 신부요, 대한민국 국민인지라. 대
한민국이 내 조국인지라. 여전히 매일같이 사건 사고가 터지고 정신없이 시
끄럽게 돌아가는 대한민국이지만 그저 여전히 내 부모 내 형제, 내 벗과 은
인들이 살고 있는 그 땅인지라 저희 성당의 교우분들과 함께 대통령 선거를
위해 기도를 봉헌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여러분, 이 방송을 듣고 계신 분들 중에는 천주교 신자인분들도, 개신교 신
자인분들도, 불교도도 회교도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게 각자의 종교를 믿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또한 무신론자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 이 순간만큼은 우리나라를 위해, 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 진
정 나라를 위해, 정의를 위해, 민족을 위해, 평화를 위해 권력의 종이 되려
고 하는 자가 아닌 민충정공처럼 죽음으로까지도
이 민족을 사랑할 수 있는
참 지도자가 우리 가운데 생겨나길 종교와 이념과 사상을 뛰어 넘어 함께
기도하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민족이 참 지혜를 얻어 참 올바른 대통령, 역
사에 빛 날 참 대통령, 다시금 혈죽을 피울 수 있는 대통령을 가질 수 있기
를, 그리고 뽑아내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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