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가지 못한 길
작성자:
김형기 스테파노         10/14/2020
내용:

가지 못한 길

가끔 유튜브로 전기공학 강의를 들을 때가 있다. 내 자식 나이쯤 되는 잘생긴 강사는 어려운 강의도 쉽게 풀어서 머리에 쏙쏙 집어넣어 주어서 어쩌다 들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최근에는 전기공학의 기본 공식이라는 주제로 ‘키르히호프의 법칙, 앙페르의 법칙, 쿨롱의 법칙, 플레밍의 법칙, 비오사바르의 법칙’ 등을 설명하는 걸 들으며 50여 년 전 대학교에서 들은 전기자기학과 회로 이론이 생각났다. 이 두 가지를 공부하지 않고는 다음 전공과목으로 나아갈 수 없는 아주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과목이다.

대학 졸업 후 우연히 우리 조상들의 독서 방식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분들이 읽은 책이라고 해야 권수로 헤아린다면 몇 권 되지 않았다. 그들은 그 몇 권 되지 않는 책을 읽고 또 읽고, 아예 통째로 다 외우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몇 권의 책이 그들의 삶을 이끄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사서삼경은 대개 수백 번씩, 어떤 분들은 천 번도 넘게 읽었다는 대목이 감명 깊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다른 건 몰라도 전기자기학과 회로이론, 이 두 권은 100번을 읽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책 표지 안쪽에 바를 정(正)자를 스무 개씩 그려 보겠다는 야무진 결심을 했다. 그러고 병역 의무를 마치고 펼쳐질 공학도로 사는 삶을 그려 보았다.

취직한 곳은 당연히 전자 회사였다. 그것도 당시 최고의 기업으로 꼽히던 곳이었다. 지방에 있는 생산 부서로 발령이 나려니 했는데 뜻밖에도 서울에 있는 사무실로 발령을 받고는 어리둥절했다. 공학도가 펜대를 굴리며 할 일이 뭘까? 거기서 주로 한 일은 영어나 일본어로 작성된 특허 명세서를 분석하고 번역하며, 특허 분쟁에 대응하는 일이었다. 대학교에서 배운 전공과목은 어쩌다 특허 명세서에서 나온 회로도를 분석할 때 써먹을 뿐, 업무 대부분은 힘써 공부하지 않은 영어와 일본어 그리고 특허(특허, 실용신안, 의장, 상표) 관련 법률이니 이런 일이 공학도가 할 일인지 회의가 들었고 대학교에 다닐 때 배운 전공 지식이 쓸모없어졌다고 생각하니 허전했다. 그래도 서울에서 근무할 수 있다는 특권 의식, 적지 않은 보수, 일류 기업체에 다닌다는 자부심으로 큰 불만 없이 직장생활에 적응하게 되었다.

몇 년 후 다른 부서를 거친 다음 미국에 주재원으로 발령을 받고나서 짐 정리를 하다가 까맣게 잊고 있던 대학 교재 몇 권을 발견하고 가지 못한 공학도의 길, 작업복 대신 넥타이를 매고 지낸 지난 몇 년간의 직장생활을 회고하며 교재를 뒤적이다 전기자기학과 회로이론 교재를 발견했다. 100 독 하겠다던 다짐이 생각나서 표지 안쪽을 펼쳐 보았더니 바를 정자 대신 아래 하(下)자가 하나씩 표시된 걸 보았다. 이제는 쓸모가 없어진 책이지만, 채우지 못한  97 독이 마음에 걸렸고, 버리기에는 아쉬워서 형네 집 다락방에 두고 왔는데 벌써 40년 세월이 흘렀다. 그 두 권 책의 안부를 물어보지는 않았어도, 오래전에 집을 새로 지으며 버렸을 거로 생각한다. 돌아올 기약 없는 주인을 기다리다 버림받은 그 책들을 생각하면 참 미안하다.

가끔은 공학도의 정도(正道)를 걸었더라면 내 삶이 어땠을지 생각해 보곤 한다. 가지 못한 길이라서 아쉬움이 남아서 그럴 게다. 몇 년 전에 미적분학(Calculus)책을 사서 끝까지 보지 못하고 포기했다. 이베이(eBay)를 통해 회로이론(Circuit Theory)과 전기자기학(Electro-Magnetics)책을 사려고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포기했다. 이런 식으로 가보지 못한 길은 아직도 나를 유혹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내 나이가 어때서’는 노랫말로나 통할 수 있는 거다.

몇 년 전에 신문에서 본 어떤 트레일러 운전기사 이야기가 생각난다. 성공적인 치과 의사로 살다가 매일 환자들의 입만 들여다보는 생활에 회의를 느껴서 트레일러 운전기사로 전직했는데 수입은 이전의 3분의 1 정도밖에 안 되지만,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생활이 행복하다고 했다. 그리고 사지 장애를 안고 태어났지만, 안정적인 수입을 올릴 수 있는 변호사가 되었어도, 노래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해 몇 년 후 성악가의 길을 택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토마스 크바스토프, 나는 이들이 부럽다. 이들은 두 가지 길을 모두 가보고 자신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다른 길을 택했더라면 내 삶이 더 행복했을까? 그건 나도 모른다. 그건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인생이 다 그런 게 아닐까? 그래서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The Road Not Taken(가지 않은 길)’이 널리 사랑받겠지.

(전략)

먼먼 훗날 어디에선가 / 나는 한숨 쉬며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어 /
나는 사람이 덜 다닌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 그것이 내 인생을 이처럼 바꿔 놓은 것입니다" 라고

(2020년 6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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