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바이칼 호의 무당
작성자:
김형기 스테파노         11/19/2020
내용:

바이칼 호의 무당

나와 오랜 세월 가까이 지내 온 P 씨는 우리 민족 상고사(上古史)에 관심이 많아 그 분야의 전문 서적도 열심히 읽더니 고대사에 관하여 아는 것이 많다. 그래서 그가 몇 년 전에 소문도 없이 한민족의 역사가 비롯된 곳이라는 바이칼 호에 다녀왔다는 얘기를 듣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낮도깨비 같은 친구가 또 고대사 연구를 위한 현지답사인지 뭔지, 엉뚱한 일을 저질렀으려니 하고 생각했다. 먹고 사는데 아무 상관 없는 일에 매달릴 수 있는 그런 여유가 부러웠다.

바이칼 호 여행담이라도 들을까 해서 기대를 하고 나간 식사 자리에서 그는 엉뚱하게도 바이칼 호에서 만났다는 무당 얘기를 했다. 바이칼 호에서 주문을 외며 굿을 하는 무당을 보았는데, 듬직한 체구, 온몸에서 내뿜는 카리스마 그리고 잘생긴 모습이 영락없는 박어거스틴 몬시뇰이더라고 했다. “박몬시뇰님이 바이칼 호” 부근에서 태어나 자랐더라면 그런 무당이 되었을 겁니다.”라는 그의 말이 전혀 불경스럽게 들리지 않았다. 

오랫동안 성당에 나오지 않은 P씨지만, 몬시뇰님에 대한 존경심은 지극했다. 일 년에 두어 차례는 잊지 않고 몬시뇰님이 즐기시는 음식을 대접하곤 했는데,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을 찾아 두 시간 정도의 거리도 마다치 않고 모셨고, 때로는 음식 솜씨가 뛰어난 그의 부인이 집에서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차려놓고 대접하기를 즐겨 하였다. 그런 자리에 몬시뇰님을 모시고 가는 일이 우리 부부가 맡은 일이었는데, 원님 덕에 나팔 부는 역이었건만, 때로는 우리가 그분을 대접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으니 착각치고도 매우 고약한 착각이었다. 

몇 년 전 오늘, 11월 19일, 그러니까 공교롭게도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에 P 씨 부부와 함께 몬시뇰님의 숙소를 찾았다. P 씨의 부탁으로 멀리 뉴욕 주의 호숫가에서 장어 전문 식당을 운영하는 주인장이 그 먼 거리에서 몬시뇰님이 좋아한다는 장어구이를 잔뜩 장만해서 직접 갖고 왔고, P씨 부부는 엄청난 양의 생선회와 최고급 위스키를 준비해 왔다. 걷는 것조차 힘겨워하던 몬시뇰님을 위한 배려였다.

언젠가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몬시뇰님이 즐기시는 음식을 대접하게 한인 타운의 식당으로 모시고 나오라기에 그분의 건강이 매우 악화하여 음식도 잘 드시지 못하니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다. 그러면 음식을 준비해서 찾아뵙겠다고 하기에 그것도 어려울 거라고 대답했더니 저으기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분이 세상을 떠나시자, 입원하시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음식을 장만해서 찾아뵈었어야 했다고 애통해 한다더라는 얘기를 그의 아내에게 전해 들으니 나도 무척 마음이 아팠다.

그분이 이 세상에서 혼자 집전한 마지막 미사가 바로 그들 부부를 위한 것으로 기억된다. 사연인즉슨 이렇다. 다리 관절에 이상이 생겨 고통스러워하던 그가 다들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혼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나섰다. 한 달 이상 걸리는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그를 보니 다리 상태는 악화했지만, 체중도 줄고 표정이 밝아서 더 건강해 보였다.

힘든 순례길에서 인생에 대하여 깊이 성찰해 보고 가족, 특히, 아내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다며 마침 결혼기념일도 가까워져 오니 부부의 사랑을 재확인하는 특별 미사를 드리고 싶다고 했다. 우리 부부가 가족 외의 유일한 하객으로 참석한 그 날의 미사는 감동적이었다. 절뚝거리는 발걸음이었지만 행복해하던 그와 그의 아내, 그의 가족 그리고 불편한 몸으로 미사를 끝까지 집전해 주신 몬시뇰의 모습을 이 세상 끝날까지 잊지 못할 것만 같다.

몬시뇰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벌써 오 년이 지났다.      

생각해 보니 성당에 제대로 나오지도 않던 P씨는 늘 그분을 가슴에 담고 지냈는데, 성당에 열심히 나가며 늘 가까이서 그분을 대할 수 있었던 나는 그분을 위해 제대로 해 드린 일이 아무것도 없다. 내 삶이란 게 이처럼 가식투성이인 것 같아서 부끄럽다.

가을이 깊어가니 낮도깨비 같은 그의 전화가 기다려진다.

“김형, 몬시뇰 닮은 무당 만나러 바이칼 호로 같이 떠납시다.”라는 전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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