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군자와 소인
작성자:
김형기 스테파노         1/14/2021
내용:

군자와 소인

나는 미사의 강론에 집중하지 못하여 딴생각에 빠지는 일이 잦으니 아무래도 나이롱 신자인 것 같다. 먼저 주일에도 그랬다. 주례 사제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주제로 강론을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내 머리에는 느닷없이 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니 이 또한 군자 아닌가?)라는 논어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예수님 말씀과  공자님 말씀이 비슷하지도 않은데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다.

대학 입학 후 큰마음 먹고 논어와 맹자를 구해서 끝까지 읽어 보리라 결심하고 틈틈이 읽었건만, 논어는 절반도 채 못 읽은 채 손을 놓고, 맹자는 여기저기 뒤적거리다 말았는데, 한참 기억력이 왕성할 때 읽어서 그런지 지금도 불쑥 논어에서 본 글귀가 생각나니 참 별일이다. 맹자는 사단(四端) 편에 나오는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만 생각날 뿐이니 나의 사서삼경에 관한 지식은 딱 그 정도이다. 하지만 가끔 글을 쓰며 변변치 않은 부스러기 지식을 늘어놓으며 유식한 체하니 젊은 시절의 독서가 먹고사는 데 그리 도움을 준 건 없어도 그게 시간 낭비는 아니었나 보다.

논어나 맹자를 보면 ‘이러이러한 사람은 군자이니라’(~~君子乎) 라는 구절이 참 많이도 나오는데 그런 걸 읽을 때마다 군자란 나와는 거리가 먼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국어사전에는 군자를 ‘행실이 점잖고 어질며 덕과 학식이 높은 사람’이라고 풀이해 놓았는데 이 또한 나와는 거리가 머니 나는 아무래도 논어와 맹자에서 일컫는 소인(小人)에 가까운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렴 어떤가. 군자 소리 들으며 불편하게 살기보다는 소인이라고 불리어도 맘 편하게 사는 게 낫지.

그런데 군자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무얼까? 아무래도 gentleman(신사)일 것 같다. ‘양복을 의젓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아니라 ‘품행과 예의가 바르며 점잖고 교양이 있는 남자’라는 의미가 이 단어에 딱 맞을 것 같다. 다음 성경 구절에서 사랑이란 단어를 신사로 바꾸면 신사를 완벽하게 정의한 게 될 듯싶다. “신사는 참고 기다립니다. 신사는 친절합니다.……”(이하 생략)처럼. 기회 있을 때마다 이렇게 성경 말씀을 들먹거리니 나는 예수쟁이가 맞기는 맞나 보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1코린 13, 4-7)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니 이또한 군자 아닌가?’

나이 들고 별로 하는 일도 없으니 이제는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그게 그리 서운하지도 않고, 이 말씀대로 살기가 그리 어렵지 않으니 이제서야 나는 군자의 경지에 들어선 게 아닌가 싶다고 생각하며 人不知而不溫~에 빠져있다보니 어느새 미사가 끝나 버렸다.

미사 후, 성당 식당에서 점심을 하는데 나이 지긋한 분이 서류를 들고 내 식탁으로 오더니 봉투에 든 서류를 내밀었다. 따님이 개명을 하는데 필요하다며 한국의 가족등록부를 영문으로 번역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한문식 표현이 어려워서 번역업자도 난색을 표하더라는 말을 듣고 보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내 번역 실력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니 흐뭇했다. 그런데 그분이 자리에서 일어서자마자 또 다른 분이 서류 가방을 들고 내 자리로 찾아왔다. 늘 헌신적으로 성당에서 봉사하는 C 박사였다. 먼저 우리 딸들의 안부를 자상하게 묻기에 최근에 승진한 작은딸 얘기, 최근에 셋째 아이를 낳은 큰딸 얘기를 신나게 늘어놓았는데 그게 바로 떡밥이었다. 내 자랑을 들어줄 만큼 들어주더니 그분은 가방에서 예비 신자 용 교리문답서 한 권을 꺼냈다. 그러고는 100쪽 가까이 되는 내용을 한글에서 영문으로 번역해 줄 수 있겠느냐고 정중하게 묻는데 거절하기가 어려워서 한번 해 보겠다고 대답하기는 했지만, 참 난감했다. 그래서 영문학을 전공한 사람도 여럿 있는데 왜 하필이면 영어가 짧은 나같은 공학도에게 부탁하느냐고 물었더니 할 만한 사람도 없고, 해주겠다는 사람도 없더라는 대답이었다. 그래도 박사님이 오죽잖은 내 번역 실력을 알아준다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서 요즈음 팔자에도 없고, 돈벌이도 안 되는 번역에 매달리려니 골치가 아프다. 그래서 가끔 아픈 머리를 쥐어 밖으며 자책한다.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니 군자라고 착각하더니 추어주는 말에 그렇게 쉽사리 넘어갔더냐? 이 소인배야”

(2019년 7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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