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이다. 해마다 새로이 오시는 예수님을 모신 기쁨에 젖어 있다 보면 어느새, 새해 첫날이 밝는다. 우리의 설렘은 어제하고는 확연히 다른 내가 탄생하리라는 공상까지도 무한정 허락하는 새해의 너른 품에서 시작된다. 단 하룻밤을 빌미로 생각이 달라지고 포부가 자라나며 또 다시 꿈을 갖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사실 새해라고는 하지만 어제와 다르지 않은 날의 연속이다. 어젯밤에 먹은 것이 새해인 오늘 아침에 소화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새해는 모든 것을 새롭게 느끼게 하는 힘을 가졌다.

좋아질 것이다. 이루어질 것이다. 해낼 수 있다. 달라질 것이다…….

새해는 갖은 추임새를 넣으며 우리에게 힘을 내라고 부추긴다.

지난해에는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아쉬운 일이 많았다. 우리네 삶이 복잡하고 힘든 때인 만큼 더욱 그랬다. 그래서인지, 요즘엔 성탄이 오고 해가 바뀌어도 모든 게 시들한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연말이 되고 연시가 다가오면 너도 나도 무언가 새로운 다짐을 하기도 했고, 가는 해를 돌아보고 오는 해에 희망을 싣기도 했는데 어째 그런 분위기마저 뜸하다.

우체통이 넘쳐날 만큼 쌓였던 성탄 카드나 연하장도 부쩍 그 수가 쓸쓸해졌다. 간단히 전화로, 더 간단히 메일로, 문자 메시지 한통으로 서로의 존재를 ‘필요한 만큼만’ 확인하며 살아가노라니 새삼스럽게 인사를 건네기조차 쑥스러운 것이 요즘 우리의 인간관계인 것 같아 빈약한 주머니처럼 허전하다.

그럼에도 마음 좋은 세월은, 시간만 흘려 버린 우리에게 ‘한 살’이라는 선물을 보내온다. 작년 나이 더하기 일은? 이것이야말로 어김없이, 조건 없이 주어지는 하늘의 선물이다. 나이라는 선물을 받은 우리는 한 해를 되돌아보고 아쉬워하며 미련을 끌어안기도 한다. 다만 지난날의 내 삶이 자랑할 것도 없고 속 시원한 것이 없더라도 실망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고통으로 일군 성숙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은 진실이고, 잃은 만큼 얻은 지혜도 소중한 까닭이다. ‘살아 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성숙할 수 있는 일이야말로 나이가 주는 축복이다.

세례는 죄를 벗어난 ‘새로 남’이다. 세례는 죄로부터 알몸이 되는 작업이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벗고 알몸이 된 우리를 새 옷으로 단장해 주시며 기뻐하신다. 그 옷은 우리를 매일매일 새롭게 꾸며 주는 신비의 옷이며, 새 것을 좋아하는 하느님께서 손수 입혀 주신 소금의 옷, 빛의 옷이다.

모세는 하느님의 땅에 맨발로 섰을 때 비로소 새 사람이 되었다. 맨발의 모세는 새로운 것을 보고 새로운 것을 말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도망자에서 인도자로, 나그네에서 약속을 향해 나아가는 이로 변화된 것이다.

세례 받은 우리는 죄에 대해서 벌거숭이다. 이제 사랑으로 만든 새 옷을 입어야 한다. 새 계명의 옷으로 갈아입은 우리는 맨발로 새 삶을 약속 받은 모세처럼 달라질 것이다. 새로운 것이라면 눈이 번쩍 뜨이는 우리의 심성을 헤아리시고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선물하신 것은 아닐까?

“서로 사랑하라.”

완전히 새것이다. 창세 이후 이처럼 새로운 것은 없었다. 그뿐인가? 하느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까지 약속하신다. 하느님께서 정말 새것을 좋아하신다는 사실은 죄에 절은 죄인을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세상의 새로움을 위해서 아들 예수님마저 아끼지 않은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 18)라고 외치는 바오로 사도의 외침을 기억하는가?

인간의 창조는 하느님께도 분명히 새로운 도약이었을 것이다. 외아들 예수를 대속의 제물로 삼으시려는 계획은 또 얼마나 엄청난 도전이었겠는가? 아들 예수를 희생시키는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아버지 하느님은 수천 년을 ‘미루셨을 만큼’ 힘이 들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힘들이고 공들이신 하느님의 히든카드로 예수님이 오셨다.

빳빳한 새 카드를 묻어 두고 있지는 않은가? 새것에 집착하고, 새것을 위해서 일생을 허비하느라 세상은 기진해 있다. 허기진 세상에 ‘항상 새로우신’ 하느님의 카드로 신바람을 일으키자. 세상 어느 카드도 줄 수 없는 생명의 약관이 선명하고 기쁨, 평화, 사랑의 보너스도 엄청난 카드를 팍팍 사용하자. 매일을 새 계명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구석구석 훈훈한 세상을 약속하셨다. 세상의 모든 이가 하느님의 히든카드 회원이 되는 그 날을 예수님은 꿈꾸신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이사 43, 18).

이렇게 좋은 ‘덕담’을 주신 하느님께 세배를 올리고 싶다. “하느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