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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한창이던 지난 초복,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괄괄한 경상도 말씨였다.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은 주부가 피해보상금을 기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부부도 푸르메재단에 작은 기부를 하고 싶습니다.” 투박하면서도 신뢰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며칠이 지났다. 초로의 부부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재단 문을 들어섰다. 이재식(63)·양남수(54) 부부였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두 분 모두 거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이재식 씨는 군대 훈련 도중 발목인대가 파열돼 다리를 제대로 굽히지 못하는 3급 장애인이 됐다. 부인마저 2년전 중풍으로 쓰러지자 이 씨가 가사 일을 돌보며 부인의 재활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고 했다.
부인 양 씨는 “며칠 전 TV를 보다 황혜경 씨가 영국 보험회사와 8년 간의 소송 끝에 받은 보상금 10억 원을 기부하는 것을 감동 속에 지켜봤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들 부부가 봉투 속에서 조심스럽게 내놓은 것은 노후에 쓰려고 마련한 시가 3억 원 상당의 토지 문서였다. 양 씨는 “건강하고 행복할 때 아픈 사람이 안 보였는데, 이제 불행이 남의 문제가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됐다”며 “어려운 사람을 위해 재활병원을 짓는 데 사용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직 중풍이 회복되지 않아 입술이 많이 떨리고 발음조차 부정확했지만 목소리는 너무 고왔다. 사무실이 숙연해졌다. ‘하느님은 왜 이렇게 선한 사람들에게 불행을 내리시는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장애가 많은 것을 앗아갔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갖게 했다”는 말을 남기고 부부는 사무실을 떠났다.
앞서 한 달 전에는 미국 콜롬비아 대 박사과정으로 유학을 떠나는 이현아(27) 씨가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보내왔다. 1년 동안 고생한 알토란같은 1000만원이었다. 구좌를 추적해 어렵게 만난 이 씨는 “800㎞가 넘는 피레네산맥 길을 혼자 걸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까’ 고민하다, 우연히 가톨릭 월간지 「야곱의 우물」에서 ‘장애환자’에 대한 기사를 읽고 기부를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구릿빛으로 검게 그을린 얼굴이 빛났다.
할아버지가 암으로 입원한 뒤 비로소 할아버지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다는 여중생부터 한 해 동안 가족이 건강한 것에 감사한다고 편지를 보낸 주부까지 매일 아름다운 사람을 만난다. 세상 살기 험해졌다는 뉴스를 매일 접하지만, 지난 한 해를 뒤돌아보면 그보다 몇 배, 몇 십 배의 아름답고 선한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선한 마음들이 모아져 교통사고와 뇌졸중 등 장애로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들이 하루 빨리 새 삶을 찾게 되길 기대해 본다.
백경학 미카엘·푸르메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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