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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청명한 독일의 어느 가을날, 우리 가족은 귀국을 앞두고 분주했다. 1년 반 전 영국 스코틀랜드로 자동차 여행을 떠났다가 아내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이 사고로 연기됐던 귀국날짜가 불과 한 달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아내는 두 달이 넘는 혼수상태와 세 번에 걸친 다리 절단수술을 받은 뒤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오지병원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아내를 지켜보며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성모송을 바치는 것뿐이었다. 내게 겨자씨만한 신앙심도 없었지만 잠결에도 성모님을 찾았다. 아내의 사고소식이 전해지자 유럽 한인공동체는 아내의 소생을 간구하는 미사를 일제히 올렸다. 많은 신자들의 간절한 기도는 기적을 낳았다.
아내가 독일병원에서 1년 동안 재활치료를 받은 뒤 사람 몰골로 돌아오자 우리 가족은 귀국을 서둘렀다. 귀국에 앞서 따뜻하고 화창한 주말을 택해 아내와 뮌헨 도심에 있는 백화점을 찾았다. 그리운 친지에게 작은 선물을 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날 따라 뮌헨 시청 앞 광장과 백화점에는 장애인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무슨 사단이 난게 분명했다. 목발을 짚은 사람, 전동 휠체어를 탄 사람,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장애인을 위해 온 가족이 출동한 경우도 있었다.
물건을 서둘러 산 뒤 점원에게 물었다. “무슨 장애인 시위가 있나요?” 점원은 이상하다는 듯 “이렇게 화창한 날씨에 집에 있을 장애인이 어디 있어요? 소풍 나온 거예요.” 나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3년 넘게 독일에 살았지만 교통사고 전까지는 내 눈에 장애인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날 장애인 시위(?)를 목격한 이후 붐비는 지하철 안에도, 대학 식당과 도서관 서가에서도, 담배연기로 찌든 슈바빙의 흑맥주 집에도 장애인의 모습이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4월, 두 팔과 두 다리를 사용할 수 없어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영국 출신 구족화가 앨리슨 래퍼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녀는 팔다리가 짧고, 힘이 없어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늘 주위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중증 장애인이다. 하지만 그림과 사진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날리고 있다. 내가 물었다. “당신은 중증 장애인인데 어떻게 유명해질 수 있었습니까?” 그녀는 영국 정부가 보모와 가정교사를 배치해 자신을 돌보고 대학 교육을 시켰으며 아들 ‘팰리스’를 낳고 직업 활동을 할 수 있게 한 것도 영국 사회복지제도 덕분이라고 힘주어 대답했다. “그런데 한국 장애인들은 어디 있나요? 쉽게 만날 수가 없네요?”하고 그녀가 물었을 때 나는 참 부끄러웠다. 독일에서 산책 나온 장애인들을 보고 시위가 있느냐고 물었을 때처럼 부끄러웠다. 늘 장애인들은 그 자리에 서 있지만 나는 그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적어도 가톨릭 교회만큼은 문턱을 낮추고 따뜻한 눈길로 장애인을 제대로 바라봤으면 좋겠다.
김전 사도요한 교수·이주노동자 무료진료소 라파엘클리닉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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