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도 잊혀 지지 않는 그리움…

  1. "상헌씨, 우리 결혼 한 번만 더 생각해 봐."

     상헌을 바라보며 지혜는 슬픈 얼굴로 말했다.

     "이제 와서 마음 약해지면 안 돼."

     "의사들도 가망이 없다는데, 무슨 희망이 있겠어?

     맨 날 이렇게 누워만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아.넌 이겨낼 수 있어."

     "내 마음이 더 아플까봐 그래, 상헌씨."

     "그러지마. 나를 생각해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 지혜야."

     상헌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두 사람은 끝내 결혼했다.

     서울 변두리의 조그만 전세방에 살림을 차린 두 사람은 행복했다.

     상헌은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을 준비했고,

     지혜가 먹을 점심 밥상까지 차려놓고 출근했다.

     그리고 퇴근하면 곧바로 시장으로 가서

     지혜가 좋아하는 반찬을 사다가 저녁을 준비했다.

     상헌은 누워 있는 지혜가 보이도록 방문을 조금 열어 놓고

     백열등 하나가 힘겹게 매달린 어두컴컴한 마당에서 빨래를 했다.

     힘없이 누워 있는 지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러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려고 몇 번이고 고개를 떨 구면서…

     그러던 어느 날,

     급작스런 병의 악화로 지혜는 다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예정된 시간이 온 듯 지혜는 밤새도록 신음했다.

     병실에 누워 있는 그녀를 바라보다 가슴속 가득 눈물이 차오르면

     상헌은 병실 밖으로 나가 소리 없이 울었다.

     창백한 손등으로 떨어지는 눈물을 닦으면서,

     지혜의 야윈 손의 손톱을 깎아주면서 상헌은 기도했다.

     지혜가 저 세상으로 가지고 갈 만큼의 사랑을 줄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하지만 지혜는 꽃잎 같은 영혼을 끝내 떨 구고 말았다.

     지혜는 떠났지만 상헌은 그녀를 보낼 수가 없었다.

     몇 년이 지나도록 지혜가 그리울 때마다

     지혜가 좋아했던 안개꽃을 들고 대구에 있는 처가로 갔다.

     죽은 지혜가 처녀시절 사용했던 앉은뱅이 책상위에

     지혜의 사진과 안개꽃을 놓아두고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서…

     그것이 상헌에게는 지혜와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녀의 방에 있는 조그만 창문을 열면

     그녀는 달빛으로 쏟아져 방안으로 들어왔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하얀 눈을 툭툭 털며 들어올 것 같은

     지혜를 위해 상헌은 정신 나간사람처럼 대문을 활짝 열어두기도 했다.

     그러다 눈이 그치고 어둠이 내리면 지혜가 덮던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내어 울기도 했다.

     아침부터 가을비가 내렸다.

     상헌은 네 시간이 넘도록 버스를 타고 대구에 있는 처가에 도착했다.

     "저 왔어요, 장인어른. 그간 안녕하셨지요?"

     "김 서방 왔나? 어여 들어오게. 전화라도 하고 오지 않구서."

     "그저께는 지선이가 다녀갔는데, 오늘은 자네가 왔구먼."

     "처제가 다녀갔어요? 그저껜 가, 저한테도 전화가 왔었는데."

     "으응, 그랬었구먼. 그저께 밤에 불쑥 찾아와서는

     자네 얘기를 얼마나 했는지 몰라.

     지 언니 방에서 하룻밤 자고는 어제 아침 먹고 다시 부산으로 갔어.

     오후에 수업이 있다구."

     "그랬었군요."

     "며칠 전 꿈에서 지 언니를 본 모양이야.

     그 날도 지 언니 생각이 나 밤늦은 시간인데도 왔을 테지 뭐.

     지선이가 형부 보고 싶다고 몇 번을 말하던데."

     한숨 섞인 목소리로 그의 장모가 말했다.

     2. 장인은 잠결에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어디서 나는 소리야? 거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네."

     "시계 소리 아니에요?

     또 어느 집에서 시계 맞춰 놓고 못 일어나는 모양이지요."

     눈을 감은 재 잠을 자던 상헌의 장모가 느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그만 일어나야지. 김서방 일찍 갈지도 모르는데."

     "아니 예요. 김 서방 오늘 저녁 차 타고 서울 올라 간데요.

     늦게까지 잔다고 깨우지 말랬어요."

     "그나저나 김 서방 얼굴이 말이 아니던데."

     "누가 아니래요. 어젯밤에 화장실 가는데 지혜 방에서

     김서방 우는 소리가 들리더라구요. 어찌나 속상하던지…"

     "근데 도대체 어느 집에서 나는 소리야, 저 시계소리?

     시끄러워 죽겠네. 새벽부터 들리더라구."

     "귀도 밝으시네요. 나는 잘 들리지도 않는구먼.

     저는 나가서 아침 준비해야겠어요."

     장모는 길게 하품을 하며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숨넘어갈 듯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여보, 어쩌면 좋아요. 빨리 지혜 방에 좀 가 봐요."

     "왜 그렇게 놀라서 그래?"

     "저 시계 소리 지혜 방에서 나는 소리에요.

     시계소리는 계속 울리는데 아무리 방문을 두드려 봐도 대답이 없어요.

     어서 빨리 가 봐요. 어서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상헌의 장인이 문을 부수고 방안으로 들어갔을 때,

     상헌은 안개꽃을 가슴에 가득 안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 위에는 유서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아내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시간이 지나면 잊혀 질 거라고,

     그렇게 잊으며 살아가는 거라고 나를 위로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죽은 아내가 더욱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아내의 곁으로 갑니다.

     부디 저의 죽음을 슬퍼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아내를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하니 더없이 평화롭고 기쁩니다.

     3. 상헌은 온몸이 땀에 젖은 채 어둔 사막을 걷고 있었다.

     발밑의 모래는 낙지의 흡판처럼 상헌의 몸을 빨아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크고 검은 물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은 공룡처럼 느리게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눈에선 신비스러울 만큼 푸른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 푸른 광채는 금세라도 상헌을 삼켜 버릴 것만 같았다.

     상헌은 눈이 부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상헌이 고통스럽게 다시 눈을 떴을 때,

     커다란 나무는 사라지고 없었다.

     투명한 햇살 한 줄기가 상헌의 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아주 가까이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 서방? 이제 정신이 드는가?"

     상헌의 장모는 놀라 흐느끼며 물었다.

     "여보, 진정해. 이 사람 놀라겠어."

     상헌은 눈을 뜨고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사람들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나 알아보겠나, 김 서방?"

     상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인 옆에 서 있는 장모와

     처제 지선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감은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음날 아침,

     상헌은 병실의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굵은 빗줄기가 세차게 유리창을 두드리며 흘러내렸다.

     "형부, 왜 이러셨어요? 다들 견디며 살아가는데…"

     지선은 상헌의 손을 잡은 채 울고 있었다.

     "형부, 며칠 전에 형부한테 왜 전화 걸었는지 아세요?

     사실은 그때 꿈에서 언니를 봤어요.

     꿈속에서 우리 집 마당을 걸어가는데

     언니 방에서 울음소리가 들렸어요.

     그래서 급히 들어가 보니 언니가 흰 옷을 입고 슬프게 울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그 날 형부한테 전화 한 거예요."

     "김 서방, 왜 못난 짓을 했어?

     지선이가 집에 다녀가지 않았다면 큰 변을 당했을 거야.

     내가 그 시계소릴 못 들었으면 어쩔 뻔 했나?

     지선이 오던 날, 안방에 있던 시계를 그 방에 갖다 놓았기에

     망정이지."

     "그러게 나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