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이의 한가위, 산이의 명절>

 딸 다섯에 아들 하나 그렇게 육남매를 가진 할머니가 계십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렇게 자식을 두고 있다면 참 많은 숫자의 자녀이지만, 할머니 세대에 있어서는 결코 많은 숫자는 아닐 것입니다. 

여하튼, 자식을 여섯이나 둔 한 할머니는 그 노구의 몸을 이끌고 매년 명절이 되면 차례상을 준비하고 자식들 오면 먹이고 싸 줄 거라고 산더미처럼 정말 산더미처럼 많은 음식을 해대곤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명절 당일에는 장가 안 간 아들과 단 둘이 지낼 뿐 아무도 찾아오지를 않습니다. 다들 시댁에서 차례를 지내야 하고 시댁 식구들과 먼저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시종 쉬지 않고 “좋은 명절 되세요. 덜도 말고 더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세요” 등등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만 사실 할머니와 어린 아들이 우두커니 앉아 있는 집에는 가끔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만이 진정한 소리입니다.

 “엄마 내일 오후에 갈께요” 혹은 “할머니 내일 갈께요” 하는 손자들의 목소리입니다.

여전히 할머니는 묵주기도를 하며 “그래 그래 내일 와” 하며 아쉬운 듯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전화기만 매만집니다.

명절이기에 밥상위에는 온갖 나물과 풍성한 음식들이 한가득 차려집니다. 하지만, 여전히 어린 아들과 늙은 노모만이 앉아 있는 밥상머리는 허전하기만 합니다. 평소보다 많은 반찬에 평소보다 큰 상을 펴고 앉아 있지만, 평소와 똑같이 둘이 앉은 그 상에는 그저 평소와 같은 밋밋함만이 아니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한 허전함마저도 감돕니다.

달은 휘영청 밝은 것이 징그럽게 밝기도 합니다만 할머니와 어린 아들은 그저 텔레비전에서 비추어 주는 달을 보고 텔레비전에서 울려 나오는 노랫소리만 듣고 앉았을 뿐입니다. 그리곤 이불을 펴고 잠자리에 듭니다.

 명절 다음날이 되면 마치 태풍이 몰아치듯 사위들과 딸들과 손주들이 몰려옵니다. “할머니”하고 달려와 안기는 손주부터 장모님께 하얀 봉투를 슬쩍 내미는 사위들까지 하루종일 정신이 없습니다. 밥상을 몇 번을 차려야 하는지 모릅니다. 밥상에 술상에 아이들의 간식까지 노구의 할머니는 쉬지를 못하고 풀방구리마냥 부엌을 들락거립니다.

어제의 그 허전함은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어디로 숨었는지 눈에 뜨이지를 않습니다. 그 넓은 상이 좁아 상을 몇 개를 더 펴지만 빈틈이 없습니다.

그래도 딸들은 괜히 죄인같습니다. 어제 찾아뵙지를 못하고 해마다 노인네 혼자 차례상을 차리게 하기에 죄인처럼 고개를 숙입니다. 명절 전날 고기 한덩이, 생선 몇 마리 새벽같이 사다가 차례 지내시라고 드다밀고는 시댁으로 또 달려가야 했던 그래서 다른 자식들에 비해 효심 지극한 자식들이지만 미안한 마음, 죄스런 마음은 여전합니다.

 자식들도 손주들도 또 바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여기에 들렸다가 저 곳에 들렸다가 이리 저리 바쁘게 뛰어야 명절날 그래도 사람 노릇 좀 하는 것 같습니다. 여하튼 명절 다음날부터 며칠은 이 노인네 신이납니다. 자식들, 손자들, 그리고 사촌들까지 한바탕 인사치례를 하고 나면 그 산처럼 쌓였던 음식들이 다 동이납니다.

그 할머니의 명절은, 추석은 추석 그 날이 아니라 그 다음 날입니다. 그렇다고 명절 당일날이 그이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명절날은 새벽같이 차례를 지내고 일찌감치 성당에 가서 돌아가신 조상님들, 먼저 간 남편 생각하며 미사 예물 봉투에 그네들 이름을 정성껏 써서 기도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노인네에게 있어서 명절날은 “죽은이를 만나는 날”이요 명절 다음 날은 “산이를 만나는 날”입니다.

 이 번 한가위를 지내며 방학도 아니고 휴가도 아닌데 대학 가서 집 떠나고 군대 가서 집 떠나고 취직해서 집 떠났던 아이들이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이 그래서 한가위가 뭔지도 잘 모르는 아이들이 미사 시간에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며 참 행복했습니다. 한국말을 잘 하진 못해도, 명절을 살아 보진 못해도 그네들도 한국의 피가 흐르기에 “명절은 다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의 만남이요, 죽은자와의 함께함”이라는 깨우침이 있지 않은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후회했습니다. 그네들에게, 여러분들에게 조금 더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 드리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그저 늘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역시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난 것이 후회 되었습니다.

큰 행사는 못할지라도 그래도 ‘조촐하게나마 술상이라도 펼치고 하다못해 고스톱 판이라도 펼칠 걸’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대보름달 예쁘게 뜨겠지요. 오늘은 사랑하는 어머니, 내 누님들, 자형들 그리고 조카들... 그리고 은혜를 주었던 모든 분들을 위해서 달빛을 벗 삼아 성모님께 기도할 생각입니다. 산자와 죽은자 모든이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추석 명절 선물 주셔서 고맙다고 인사 드려야 겠습니다.

여러분 내년에는 자치기도 하고 비석치기도 하고 쩜 당 25센트 고스톱도 칩시다. 하루종일 낮부터 얼굴 씨벌게지도록 술도 취해 보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