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을 맞으며

요즘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 새벽녘에 제법 쌀쌀한 느낌이 들 정도로 계절의 변화를 느낀다. 그렇게 작열했던 여름더위가 물러가고 파란 가을하늘이 어느 덧 우리 곁을 찾아왔다. 이번 여름은 지리한 장마비와 습도 높은 날씨 탓에 힘든 여름이었다고들 한다. 특히 세탁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의 노고에 고개 숙여진다. 팍팍한 이민사회에 휴가 한 번 제대로 가지 못한 분들이 많은 데 여름 휴가타령 하는 것이 사치스런 생각이 들 정도다.

시원한 계곡에 발을 담그고 수박을 먹으며 삼계탕과 보신탕, 오리백숙을 먹으며, 그늘진 솔밭에 누워 매미 소리를 자장가 삼아 피서를 했던 적이 언제였는지 가물거린다. 올해는 바닷가에 몸 한 번 담그지 못하고 여름을 보내는가보다.... 얼마 전 파나마 선교를 하시는 김무웅 신부님과 일행을 모시고 가까운 롱 브랜치 피어 빌리지 밤바다를 구경시켜 주었다. 나도 덩달아 밤에 처음으로 바닷가에 가보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밤하늘에 폭죽을 쏘아대는데 아마도 마지막 휴가를 마무리하는 축제인 것 같은데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우리를 위해 환영하는 불꽃놀이라고 생각하며 해변가에 도착했다. 레스토랑에는 사람들로 가득찼고, 어느 바에는 젊은이들이 줄을 서서 입장하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젊음이 넘치는 레스토랑! 대서양 파도소리가 나는 해변가를 신부님과 함께 걸으며 오랜만에 낭만에 초치는 한가로움을 맛보았다.

여유란 무엇일까? 이렇게 가까운 곳에 살면서도 밤에 나가는 것이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여름의 낭만을 즐기는 것이 이렇게도 힘들었단 말인가? 앞으로 나 혼자서라도 이런 낭만을 즐길 수 있어야 하건만 언제까지나 베이비 색에 머물러야 하는지....

혼자보다 여럿이 함께 가는 것이 더 재미있지만 때로 혼자 있는 것이 필요하다. 홀로 있음의 풍요로움! 싱글의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지 않은가!

여유만 된다면, 중남미 브라질, 파나마, 아르헨티나 등등 가고 싶은 곳이 많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로서 이튼 촌에만 방콕하니 좀이 쑤시지만 아직까지는 재충전하려면 스트레칭을 많이 해야 할 것 같다.

열악한 환경에서 사목을 하시는 김무웅 신부님이 더 높이 보인다. 사제의 꽃은 본당신부이건만 김신부님은 교포사목이 아닌 원주민과 함께 하는 온 몸을 투신하는 사목을 하시니 존경스럽다. 다섯 가지의 병을 몸에 지니고 살면서도 열정적으로 사목을 하는 힘은 순교자적인 믿음과 성령의 은총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건 사람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할 때만이 가능하다.

나 역시 편안한 한국을 떠나 여기에 온 것이 힘들었지만 김신부님의 삶을 보고서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그리고 6명의 신학생들과 함께 사는 신부님의 책임감과 사랑은 그 땅에 성소의 꽃을 피우기 위한 당신의 사목적 열정과 주님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작지만 본당에서 2차 헌금과 후원회 가입과 아이들에게 빵을 사주라고 아끼고 모은 돈을 건네주었을 때 마음이 뿌듯함을 느꼈다. 지난 번 살레시오 신부님이 오셨을 때도 조선족 청년들을 돕기 위한 신부님의 노고에 영적 물적으로 도움을 준 것도 다 하느님께 드린 것이라 생각하고 나도 신부님의 선교에 일조를 한다고 생각하니 내 자선의 배낭이 가득하고 이 또한 기쁘지 않은가?

빈 손으로 왔다 빈 손으로 돌아가는 인생이거늘, 누구를 탓하고 원망하고 그렇게 쫀쫀하게 살 필요가 어디 있는가? 가슴 한 번 열고 웃으면서 그렇게 대범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불평을 하며 사는 자는 불평으로 죽을 것이다. 누구 때문에, 누구가 미워서 전임신부님은 안 그랬는데... 신부님마다 사목 스타일이 다 다르고, 신부님들이 호의호식을 위해 사제가 된 것도 아니기에 성모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이가 사제라고 한 말도 사제가 완전해서 영성이 깊어서가 아니다. 부족하더라도 당신의 아들이기에 성모님께서 당신 망토로 아들 사제를 보호하시고 아껴주는 것이 아닌가! 나 역시 내 전 재산을 선교에 투자하는 것도 내 한 몸 호의호식하자는 것이 아니기에 모든 것 두고 가며 나중에 주님께 셈 바칠 것을 생각하며 살기에 무소유의 마음으로, 빈 손으로 가야 할 인생이기에 모두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 백성이 사막에서 불평을 하자 주님께서는 불뱀을 보내 주지 않았는가! 우리네 인생살이 그리 길지 않은데, 가까운 사람을 귀하게 여기며 존경하며 살아가면 원수가 어디 있는가?

오늘 아침미사 복음말씀 중에 예수께서 악령을 쫓아내신 이야기를 들었다. 악령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영적인 사람은 영이 맑은 사람이다. 삶이 영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늘 강조하신 어린이 영성을 지닌 사람을 말한다. 비록 나이가 들었어도 어린이와 같은 맑은 순수한 영혼을 지닌 사람을 말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람들은 대조적으로 변해간다. 세속의 때가 잔뜩 묻어 나와 뜻이 다르면 시기하고 음모와 중상과 비난과 험담을 일삼는 표독스런 마음이 닫힌 사람이 되는가 하면 세월이 흐를수록 눈빛이 맑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매가 점점 따뜻해지며 주변 사람들을 아주 편안하게 해주며 지극히 겸손해서 적당한 때 물러날 줄 알고 사려깊고 예의바르며 상대방을 존중하며 자신을 낮추며 사는 사람도 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이 시대 최고의 권위는 순수함이다. 맑고 정직하고 겸손하고 따뜻함이고 부드러움이다. 내 안에 이런 영성이 한 조각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죽기까지 이런 영성수련을 쌓아가야 할 것이다. 누가 이런 영성을 주지 않는다. 본성적으로 주어진 사람이 있지만 대부분 갈고 닦아야 할 덕목이다. 덕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신을 죽이고 교만의 껍질을 벗기고, 상대방을 인정하고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덕이 있는 사람이고 영성이 깊은 사람이다. 매일 미사에 나온다고 다 영성이 깊은 사람이 아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사람, 선입견과 고정관념의 틀을 깰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이튼 성당에 온 것은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섭리라면 그에 순명할 줄 아는 사람이 영성이 깊은 사람이다. 매일 매일이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면, 우리 역시 선물이어야 한다. 나도 너도, 사제도 회장님도 사목위원들도, 구역봉사자들도, 레지오 단원들도 우리 각자가 선물이라면 우리는 모두를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비난하고 시기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지 말고 서로를 받아들이며 사랑하며 존경하며 살아가자. 내 시간이 다 하는 그 날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충실하게 살자.

“하루를 잘 보내고 나면 행복한 잠이 찾아들듯, 인생을 잘 살고 나면 행복한 죽음이 찾아든다.”(레오나르도 다빈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