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1요한 3,18)
요한 사도는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언급합니다. 특히나 오늘날에는 ‘사이버 성인’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이런 저런 세상 일들에 분개하면서 마치 스스로를 최고의 의인으로 간주하지요. 그러나 그들의 실제 삶은 아주 작은 시련도 견뎌내지 못하는 셈입니다. 자기에게 싫은 소리를 조금만 들어도 금새 토라져 버리는 유아기적인 실천에 머물러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지요.
스마트폰이 증가하면서 너도나도 세상 정보에 보다 빠르고 쉽게 접근하게 되고, 단순히 보고 듣는 것을 넘어서서 ‘글로써’ 동참할 수 있게 되면서 너도나도 이런 저런 생각하는 글을 적고 공유하는 것이 일반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그리 많이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도 수다를 떠는 사람들은 존재해 왔으니까요. 사람들은 시장통에 모여서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들으면서 서로의 정보를 나누는 일은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아는 최고의 길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었지요.
특히 이런 영향이 ‘교회 안’, ‘종교적인 차원’으로 확산되면서 사람들은 종종 착각을 하게 됩니다. 마치 ‘좋은 글’을 읽는 것 만으로도 스스로가 신앙적으로 종교적으로 정화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실제적인 삶을 더욱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글을 읽고, 거룩한 덕목에 관해서 배우며 자신의 생각이 정돈되는 것을 느끼면서 마치 자신이 그 수준에 이르렀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인내’에 관한 가르침을 철학적이고 신학적으로 배우고 나면 마치 그러한 덕목이 원래부터 나의 것이었던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장 그날 저녁에 막내 아이가 저녁 식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칭얼댈 때, 우리의 인내는 바닥을 보이는 셈이지요. 즉 내가 읽고 배운 ‘인내’는 생각 속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사진을 보고 그것을 공유하고 ‘좋아요’를 누르지만 실제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 본 적도 없으며 들어가길 두려워하고 행여라도 그들이 내미는 더러운 손에 부정이라도 탈까봐 겁을 내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혀 ‘착한’ 이들이 아닙니다. 그저 말과 혀로 착한 척을 할 뿐이지요.
우리는 겸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만큼 준비되어 있지 않고 생각만큼 실제 상황을 맞닥뜨려 이겨낼 수 있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바를 아주 작게나마 실천하는 데에 노력을 해야 합니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슈에 분노하면서 자신에게 요구되는 아주 작은 정의의 실천은 막상 소홀히 안다면 과연 그의 분노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