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는 때로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간혹 지독히 비상식적으로 보여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불합리함은 세상의 억지논리와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그리스도교가 때로 비상식적으로 비춰지는 이유는 ‘천상의 사정’, ‘신비적 차원’을 논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패하는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여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점차적으로 완성되어 갔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신비적 차원’은 그들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 조금씩 완성되어 갔습니다.
예수님의 진복팔단은 그 ‘천상의 차원’이 없이는 아무리 머리를 써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이를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은 지상의 진복팔단을 추구하지요. 모든 불의는 어떻게든 바로 잡혀야 하고 그것을 위해 필요하다면 폭력도 불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억울함은 어떻게든 해소되어야 하는 무언가가 되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모든 것이 해소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일종의 환상입니다. 우리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바른 말이지만, 지상에서 모든 근심이 사라진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고 하는 것은 엇나간 생각입니다.
근래 들어서 의로운 이들이 너무나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불의를 대항해서 투쟁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이지요. 특히 소셜 미디어는 이러한 움직임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과연 모두 ‘투사’일까요? 그들의 그 투지는 과연 실생활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을까요? 그들이 말하는 의로움이라는 것은 과연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 것일까요?
내 가까이 있는 이웃에게 따스한 인사 한 번 건네지 않으면서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살리자고 한다면 그것은 위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상적으로 만나는 이들과 평화의 관계를 이루지 못하면서 국가의 평화를 논하는 것도 뭔가 어긋난 모습입니다. 정작 내 아내는 나의 부족한 관심과 외로움에 힘들어하는데 나는 잊혀져가는 무언가를 기억하자고 한다면 그 또한 이상한 모습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천상적 차원은 우리의 일상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의 충실성을 통해서 천상적 거룩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헌데 교회의 오류를 꼬집으면서 정작 자신은 바로 그 교회의 일원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비난한다고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실천할 때에 바뀌는 것입니다. 교회의 담당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 안에서 구체적인 변화를 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진복팔단은 지극히 현실적인 제안입니다. 하지만 그 근본은 천상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를 우리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 마음으로 가난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서 ‘오직 가난’을 외쳐대는 이들이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