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복음 선포의 일꾼들-Facebook에 jinwoo ma 신부님의 글
작성자:
sung hwan james         3/23/2016
내용:

우리가 희생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에만 집착을 합니다. 마치 그리스도교에 깊이 빠져드는 것은 자신이 가진 물질적인 것을 모두 내어놓는 것과 동일 선상에서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근본 물질이라는 것은 모두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물질에 가치를 주는 것은 마음이지요. 아무리 값비싼 다이아몬드라 할지라도 아이들이 모여서 소꿉장난을 하는 곳에 던져 놓으면 그저 공깃돌 역할 밖에 하지 못합니다. 반면 아이들에게는 딱지나 고무줄과 같은 것이 더 큰 가치를 발휘하지요. 

이처럼 마음이 가는 곳에 자연히 물질이 따라 나서는 것이고 그렇게 사용된 물질은 전혀 아깝지 않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우선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움직이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보고 들음으로 인해서 움직여집니다. 아무런 정보도 없다가 누군가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사건을 안타까워하고 애처로워하는 것처럼 우리는 보고 듣는 것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고 들어야 할까요?

세상에는 저마다 자신을 봐달라고 외쳐대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뉴스는 ‘보여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기자들이 자신의 명예를 걸고 뛰어나가서 얻어온 기사를 최대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보여지게끔 전달하려고 노력하지요. 보여지지 않는 기사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소식’들 가운데 ‘새로운 소식’, ‘기쁜 소식’ 즉 복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사람들이 진정으로 참된 행복을 찾도록 도와주는 소식이지요. 그것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예수님이 바라셨던 일꾼은 이 복음의 전달자인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이라는 것은 어떻게 전달될 수 있을까요? 거짓말쟁이가 아무리 자기 말을 믿어 달라고 한들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남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살라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이고 기만이겠지요.

복음은 선포되어야 하지만 그와 더불어 살아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 복음, 그저 말로만 전해지고 책의 문자로만 전해지는 복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복음의 선포자가 되기 위해서 씨앗은 죽어야 하고 땅에 묻혀야 합니다.

복음 선포자는 자신의 삶을 희생해야 합니다. 자신의 시간과 노력과 모든 것을 희생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복음에 힘이 실리게 됩니다. 돈이라는 것, 재화라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돈을 아무리 내어주어도 복음화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참된 복음화는 기쁜 소식을 살고 드러내고 그것을 가르칠 때에 이루어집니다.

세상에는 이런 일꾼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짓고 하는 모든 활동은 가장 근본에 복음 선포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핵심이 사라진 모든 활동은 NGO들의 활동과 하나도 다를 게 없습니다. 교회는 사회복지를 위한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단체이고 그것을 위해서 여러가지 부가적인 행위가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것이 최우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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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 교리서
239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신앙의 언어는 주로 두 가지 측면을 가리킨다. 먼저 하느님께서는 만물의 근원이시고 초월적인 권위를 지니셨으며 동시에 당신의 모든 자녀를 자비와 사랑으로 보살피신다는 점이다. 하느님의 부성은 또한 모성의 모습으로 표현될 수도 있는데 이는 하느님의 내재성 그리고 하느님과 당신 피조물 사이의 친밀성에 더 주목하여 가리키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의 언어도 부모들에 대한 인간적 경험에서 도움을 얻는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인간인 부모들이 그릇될 수도 있으며 부성과 모성의 모습을 왜곡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성별을 초월하신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분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인간적인 부성과 모성의 근원이며 척도이시면서도 이를 초월하신다. 아무도 하느님 ‘아버지’와 같은 아버지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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