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고해성사- Facebook에 마진우 요셉 신부 - 겸손기도
작성자:
sung hwan james         2/6/2017
내용:

고해성사

 


고해성사를 알기 위해서는 일단 ‘죄’라는 것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안에서 죄, 잘못, 탓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뭔가 올바로 해야 하는 것을 잘못했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통상적인 잘못은 법적 잘못, 윤리적 잘못, 도덕적 잘못 등등이 있습니다. 즉 무언가를 기준점으로 삼아서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잘못이지요. 그 기준점이 법이면 법적 잘못이 되고, 윤리나 도덕이면 윤리적 잘못과 도덕적 잘못이 됩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에게는 세상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기준점,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기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창조주이신 ‘하느님’이시지요. 사실 하느님이라는 분이 세상 안에 모든 질서를 만드셨기에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기준점들과 아예 다른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와 정의와 선에 어긋나는 것은 당연히 하느님에게 어긋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것의 중심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 안에 고유한 ‘자유’를 부여하셨습니다. 바로 이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에게는 ‘죄’와 ‘사랑’이 성립되게 됩니다. 만일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그저 자연의 한 부속품일 뿐이고 죄도 사랑도 없게 됩니다. 우리의 생 자체가 그닥 의미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에게는 고유한 자유가 있고 그리고 그 자유를 부여하신 분의 기준점이 있기 때문에 ‘사랑’도 ‘죄’도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가장 넓은 범위의 기준점 하나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에 합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고 사랑에 어긋나는 것은 부당한 것으로 바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폭력은 죄가 될까요?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그럼 폭력을 쓰지 않은 내적 증오는 어떨까요?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그 내적 증오에서 외적 행동이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일상 안에서 알게 모르게 수많은 부정적인 방향성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몸이 병이 나면 약이 필요하고 약국에 가거나 병원에 가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이 병들면 그에 합당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인간의 영혼은 자기 스스로의 어긋남, 자유의 그릇된 사용으로 인해서 병들게 되고 그 병은 당연히 치유를 필요로 합니다. 바로 그때에 필요한 것이 ‘고해성사’입니다.

예수님은 지상에 머무르시는 동안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사실상 십자가라는 것 자체가 죄의 용서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신 이유 자체가 바로 우리의 죄의 결과를 당신이 대신 받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그분의 제자들, 사제들은 그 권한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화해의 성사(聖事라는 말은 ‘거룩한 일’이라는 뜻입니다)’인 고해성사인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어떤 제도가 없이도 인간의 진실한 뉘우침을 보신다면 그를 기꺼이 용서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사제도 교회도 없는 곳에 머무르는데 큰 사고를 당해서 죽음의 위험에 있는 중에 정말로 진실되이 뉘우칠 수 있다면 하느님은 기꺼이 그를 용서하시겠지요. 그러나 그런 비정상적인 상황이 아닌 일반적이고 통상적인 상황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뉘우침에 대한 특별한 용서의 드러나는 표지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을 때에는 사실상 영혼을 통해서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영혼으로만 살아가지 않으며 무언가를 확증하기 위해서 드러나는 외적인 표지가 필요하지요. 이는 마치 친구가 서로를 신뢰한다고 하지만 중요한 계약을 맺을 때에는 계약서라는 물리적 수단을 작성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세례 때에도 물을 사용하고, 죽은 이를 위한 제사도 눈에 보이는 격식을 통해서 바칩니다. 마찬가지로 ‘죄의 용서’도 눈에 드러나는 필요한 표지가 있지요. 그것이 바로 사제의 ‘사죄의 말’, 즉 ‘사죄경’인 것이지요.

천주교 신자들은 사제의 사죄경을 통해서 자신이 솔직하게 고백한 죄를 용서받았다는 분명한 확신을 지니게 됩니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고해성사는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성사가 됩니다. 미사(성체성사) 다음으로 지극히 일상적이고 소중한 성사가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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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 교리서
108 그리스도교 신앙은 ‘경전의 종교’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 ‘말씀’의 종교이다. 그 말씀은 “글로 된 무언의 말이 아닌, 사람이 되시어 살아 계신 ‘말씀’”(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성자에 대한 강론』 4,11)이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이 죽은 문자로 머물지 않으려면 살아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성경을 깨닫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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