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밝히려는 성서 주석학자가 그 자신이 ‘명예욕’에 사로잡혀 있다면 과연 그에게 올바른 분별력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명예에 사로잡히지 않았던 분의 내면을 명예욕이 가득한 주석학자가 분별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는 마치 바다를 처음 보고 온 아이에게 바다의 온도가 어땠느냐? 물의 혼탁 정도는 어떠했느냐? 근처에 맛있는 횟집이 있더냐?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과 유사합니다.
성경은 단순히 학적 연구의 대상이 아닙니다. 성경은 믿을 진리가 담긴 책이지요.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믿음’이라는 것이 윽박지르는 믿음은 아닙니다. 설득하는 믿음이지요. 그러나 끝까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면 이미 ‘믿음’의 범주에 들어설 이유가 없는 셈이니까요.
소위 똑똑하다는 자들이 예수님의 삶에서 ‘실제로 있을 법한 일들’만을 골라내서 드러내 밝히고는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우겨댑니다. 이들에게는 믿음의 범주 안에서의 일은 ‘전설’, 또는 ‘미신’ 수준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서는 학적으로 연구할 거리는 얻을 수 있어도 믿을 거리는 얻기가 힘이 듭니다.
아마 저의 이 글을 접하게 된 신학자는 당장 나에게 이런 말을 할 ‘권한’을 찾을 것입니다. 나의 학사학위 논문은 무엇이었고 석사학위 논문은 무엇이었는지 말이지요. 그래서 자신들이 사전에 정해 놓은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제가 하는 말 전체를 무시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일이지요. 세상의 ‘높낮이’ 개념에 사로잡힌 이들의 전형적인 반응이니까요.
그러나 사람들은 진리를 알고 있고 느낍니다. 마음을 열고 하는 말과 학적으로 연구해서 적어놓은 말은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