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숫자의 비밀
티베리아 호수. 같은 호수인데, 갈릴레이, 겐네사렛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곳이지요.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아침저녁으로 이 호수를 산책하시며 명상에 잠기곤 하셨을 것입니다. 처음으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부른 곳도 바로 이곳이지요. 참으로 아름다운 호수입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상상해 보십시오. 저녁 바람이 호수 위로 불어오고 여기저기 밝혀 놓은 횃불에 반사되는 물결이 비치고 있는 바다처럼 넓은 아름다운 티베리아 호숫가를. 등을 단 고깃배들이 출렁이는 물결 위에 춤추듯 떠 있는 것이 보입니까? 여러분들, 혹시 호수나 커다란 저수지에서 밤낚시를 해 본 적이 있는지요? 저는 학창 시절 폐결핵을 앓아 휴학을 한 적이 있었는데 두 세 달을 낚시만 하면서 지냈었지요. 밤낚시를 할 때면 적막한 밤에 카바이드 불빛이 수면 위에 비치면 선율이 흐르듯 물살이 잔잔히 흐르는 모습이 그리 아름다울 수가 없지요. 달빛이 비치는 날이면 그 은은한 빛이 사위를 감돌고 물위에 비친 나뭇잎이 가만히 흔들이는 모습을 보면 그 아름다움에 경도 되지요. 제자들이 고기를 잡으러 간 때도 밤이었지요. 노련한 솜씨로 베드로가 그물을 던질 때 그물이 밤호수의 허공을 가르는 소리, 그물이 물에 떨어지면 수면을 가르며 첨벙하고 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오늘 복음에 보면 시몬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하자 나머지 제자들도 따라 나섭니다. 그들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으나 그날 밤에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이튿날 날이 밝아 오자 돌아옵니다. 예수께서 호숫가에 서 계시다가 묻지요. “무얼 좀 잡았습니까?” 그들이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고 하자 그물을 오른편에 던져 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는 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고기가 많이 걸려들었지요. 그 때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제자 요한이 가장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저분이 주님이시라고 말합니다. 아직 어둠이 다 가시지 않은 시간 다른 제자들이 호숫가에서 말씀을 건넨 사람이 누구인지 몰라보았지만 가장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고 믿었던 요한이 또다시 먼저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아봅니다. 누군가에게 마음이 가면 시선도 늘 거기를 향하게 마련입니다. 그는 다시 윗사람에 대한 배려로 베드로에게 저분이 주님이시라고 말합니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들은 베드로는 몸에 겉옷을 두르고 그냥 물 속으로 들어갑니다. 주님을 향한 열정으로 그냥 물 속으로 뛰어드는 베드로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급했지만 존경심과 예의로서 겉옷을 두르고 뛰어들지요. 다른 제자들은 그물을 끌며 배를 저어 호숫가로 나와 주님을 만납니다.
3년 전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간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지만 잠시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시자, 그분 없이 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맏형 격이던 베드로가 전직인 어부의 삶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일까요? 그럴 리는 없지요. 우리는 요한 복음사가가 아주 상징적인 비유를 통해서 자기의 체험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실상 요한 복음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도 많은 상징적인 의미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깊은 영적인 체험과 관상을 바탕으로 그런 경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쓴 복음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성서학자이기도 한 마르띠니 추기경은 요한 복음은 원숙한 신앙인, 곧 ‘원로들의 복음서’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이 이 이야기는 실제로 호수로 고기를 잡으러 나갔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사람 낚는 어부’로서 세상 안으로 나간 것을 상징적인 비유로서 표현하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는데 저도 동의하고 싶습니다. 그물 속에 백쉰세 마리의 고기가 있었다는 것도 실제적인 숫자라기보다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 요한 복음사가를 옳게 이해하는 것이지요. 역사적으로 유명한 세 학자의 해석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는 153은 100+50+3으로 봅니다. 100은 충만함을 나타내는 숫자이고, 50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다시 모아져야 할 ‘남은 자들’을 상징하고 있고 3은 모든 일을 함께 이루시는 삼위 일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1+2=3+4...17=153으로 봅니다. 17은 다시 10+7인데 10은 10계명을 상징하고 7은 성령이 주시는 일곱 가지 특은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십계명, 즉 율법으로 상징되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과 성령이 주시는 은총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나타내고 있다고 합니다. 예로니모는 단순히 그 호수에 사는 물고기의 종류가 모두 153라고 하며 따라서 세상의 모든 민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누구의 해석이 가장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모두가 공통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는데 예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사건이 상징적인 비유라고 하더라도 그 의미는 분명합니다. 그들이 막상 세상 안으로 사람들을 낚으러 나갔지만 그들이 아는 자기들의 방식대로 했더니 한 사람도 낚을 수가 없었는데 주님이 일러주시는 대로 했더니 많은 사람들을 따르게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있었던 사건을 전한 것이든 상징적인 비유의 표현이든 분명한 가르침은 우리가 전교를 할 때 우리의 방식대로 또는 우리의 능력이나 지식으로 해서는 안되고 그분이 이끌어주시는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함께 할 때만이, 그분이 중심이 될 때만이 참으로 전교가 될 수 있고 교회의 모든 일들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와서 보니 예수께서 숯불을 피어놓고 아침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물으시지요. “당신은 나를 사랑합니까?”라고. 왜 그러셨을까요? 베드로가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했었지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마음 깊은 속에 죄스러움과 후회, 자책 등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내면을 보시는 분.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당신을 사랑하노라고 고백하게 함으로서 베드로가 지니고 있는 죄스러운 마음을 씻어 주시고 대신 깊은 신뢰의 마음을 심어주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좀 경솔하고 덤벙거리는 모습도 보이지만 열정과 연민을 지닌 인물입니다.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자 그냥 물 속에 뛰어들 만큼 주님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있는 베드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마음 깊은 속으로 뚫고 들어 가셔서 거기서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 그의 사랑을 새롭게 하며 당신에 대한 신뢰를 더 깊이 심어 주시고자 거듭 그대는 나를 정말 사랑하는가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당신의 교회를 다시 한번 새롭게 맡기시는 것입니다. 진정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양들, 즉 당신의 사람들, 바로 교회를 돌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예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나약한 인간성에 대한 구원자로 발현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것 때문에 완전히 붕괴할 수도 있었던 그의 인간성에, 배반했다는 사실 때문에 좌절하고 평생 자신 안에 갇혀 있을 수도 있었던 그를 건져내시어 일깨워 주시고 다시 일으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또 한 사람의 베드로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잘못했던 어떤 것을 물으시지 않고 다만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는가를 물으십니다. 우리도 “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함으로서 우리의 상처를 아물게 하시며 다시 새롭게 우리의 삶을 시작하도록 하여 주십니다. 아울러 우리에게도 교회를 돌 볼 사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그에 대한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