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프

어릴 적 내 책가방은 참으로 못난이 가방이었다. 할머니이신 우리 어머니께서는 도무지 예쁜 것 보다는 실용적인 것에 우선을 두시는 분이라서 제일 질기고 튼튼하고 그리고 졸업 할 때까지 써도 충분할 커다란 놈으로 그러면서도 적당한 가격의 것들을 늘 고르셨다. 그래서 내 책가방은 참 못났던 것 같다.

필통도 그랬다. 다른 친구들 가운데 몇몇은 2단 3단 필통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사각 도시락 같은 필통이었다. 크레파스도 그랬다. 24색, 36색 크레파스를 쓰는 친구들과 달리 나는 언제나 12색이었다. 그래도 전혀 욕심을 내거나 창피해 하거나 부러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왜일까? 그 때부터 물건 욕심이 별로 없었을까? 아니 그것보다는 별로 공부에 취미가 없었기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친구들이 부러운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예쁘게 나란히 깍여 있는 연필들이었다. 친구들의 연필은 너무 예쁘게 깍여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 연필은 싸구려에 늘 못난이 연필이었다. 늙으신 어머니께 깍아 달라고 했지만, 어머니의 솜씨나 내 솜씨나 비슷하여 늘 연필은 깍인 듯 아닌 듯 싶었다. 

어쩌다 셋째 누님이 집에 오셨을 때면 꼭 필통을 내밀어 누나에게 깍아 달라고 조르곤 했다. 그러면 누나의 손길이 닿은 연필은 어찌 그리도 예쁘게 깍이는지 나는 차마 아까워서 쓰지를 못했다.

그래서 내 연필은 늘 못났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눈에 번쩍 뜨이는 탐나는 물건이 하나 발견되었다.

“샤프”라는 아주 특이하게 생긴 놈이었다.

그 날렵한 몸매에서 갑작스럽게 책칵 책칵 거리며 연필심이 나오는 그 모습은 어린 나에게는 황홀하기까지 했다.

그 매혹적인 자태는 거의 내 혼을 뺐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샤프를 갖기 위해 작전을 세웠다. 일단 연필이 없다고 해야만 사줄 것이기에 멀쩡한 연필들을 부러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머니께 연필을 사야 하는데 샤프라는 것을 사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웃으시면서 다락에서 연필을 꺼내셨다. 이미 다락에는 연필이 몇 다스나 있었다. 그것도 싸구려 연필들이 말이다. “이런 제길 저 원수같은 놈들이라니...”

그 많은 연필들을 다 써야 샤프가 생긴다니 나는 죽을 것만 같았다. 샤프에 대한 사랑은 이미 너무 깊은 병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어린 나는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매일 매일 멀쩡한 연필들의 허리만 부러뜨릴 뿐이었다.

매일 같이 친구들의 샤프에 군침만 흘릴 뿐.

 그러던 어느 날 넷째 누나집에 갔을 때 나보다 서너 살 어린 조카가 샤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연필깍이로 깍은 예쁜 연필들이(셋째 누나가 깍아 준 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예쁘게 깍인 연필들이) 줄지어 나란히 누워 있었고 그 만화 주인공이 그려진 예쁜 필통에는 커다란 지우개까지 있었다. 얼마나 탐이 나고 부러웠던지 조카에게 차마 샤프를 달라는 이야기는 못하고 연필 한 자루쯤 얻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내 어린 시절에는 그 누구하나 내 옆에 앉아 연필 한 자루 곱게 깍아 줄 이, 세상에는 샤프도 있고 연필깍이도 있다는 것을 알려 줄 이도, 숙제를 다 했는지 학교 가서 무엇을 배웠는지 물어 봐 주는 이도 하나 없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옆집에 세 들어 살던 누나와 누가 책 많이 읽는가? 내기를 해서 지지 않으려고 무지 책은 열심히-내용은 알지도 못하면서- 읽었다는 것이다. 그게 내 아주 어린 날의-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의- 기억들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마침내 샤프가 생겼다. 우리 반 여자애가 나에게 샤프를 준 것이다. “자 이거 너 써” 왜 주었는지 모르겠다. 전혀 모르겠다. 무엇 때문에 주었는지 그 아이가 나를 좋아 했는지 아니면 내가 달라고 했는지 전혀 모르겠다. 어쩌면 새로 다른 샤프가 생겨서 못난 것을 나에게 주었을지도 모르겠다.(사실 이것도 정확한 기억인지 모르겠다. 누가 준 것인지 아니면 어머니가 마침내 사주셨는지... 그래도 이왕이면 어느 이름 모를 여학생이 준 걸로 하자 그래야 하나쯤 로망이라도 생기니까) 하여튼 내 손에는 그토록 꿈에 그리던 샤프가 생겼다.

아 이 샤프라는 놈이 얼마나 멋있는가?  얼음을 지쳐 나가듯 공책위를 날아 다니니  말이다. 하지만 그 샤프는 싸구려 내 노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날카로웠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북북 공책을 찢어대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행복했다. 그 녀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나는 아마도 그 샤프로 난생 처음 “어린이 글씨 예쁘게 쓰기 대회”(이게 몇 급 몇 급 하는 등급도 매겨졌는데 그 대회 이름을 모르겠다.)에서 상이란 것을 처음 타 보았을 것이다.  그전에 개근상 외에는 단 한 번도 상이란 것을 타 본 적이 없는데 나는 그 대회에서 제일 예쁜 글씨를 쓰는 아이들 중의 하나가 된 것이다.

꿈같은 일이었다.

오늘 오랜만에 연필을 쓸 일이 있어서 연필을 쓰다가 깍기가 귀찮아 샤프를 꺼내었다. 그런데 이 샤프가 고장이 나서 전혀 작동을 하지 않는다. 뜯어보니 속은 완전히 망가졌다. 그냥 무심히 버리려다가 불현듯 옛날 생각이 떠올라 책상위에 한참을 두고는 과거로 여행을 갔다 왔다. 25-6 여년 전 그 아련한 기억으로...

그 샤프속에 내가 있었다.

부러뜨린 연필들 속에 어리석은 욕심의 내가 있었다. 그때는 몰랐던 누나의 그 연필 깍던 얼굴이 있고, 이제는 시집을 가서 어느새 아기 엄마가 되어 버린 조카가 있고, 이제는 더 늙어 버리신 어머니의 얼굴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탐내던 샤프를 이제는 얼마든지 살 수 있는 풍요로운 오늘의 내가 있다. 참으로 감사하다.

 먼 뒷날 세월이 지나고 나면 난 무엇으로 또 나의 오늘의 추억을 끄집어 낼까? 어른이 된 나는 지금 무엇을 탐내고 있을까?

나는 그렇게 오늘을 살았다. 그리고 또 다짐해 본다. “가볍게 살아야지”
 

“가난한 사람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