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를 먹고 흰머리가 나기 시작하면서 절실히 느끼는 것이 있다. 포용력이 넓어지고 편견이 없어지기는 커녕 나이가 들수록 남을 용서하고 나눔을 실천하기 어려워진다는 사실이다. 한순간에 아내를 장애인으로 만들었고 고통을 안겨 준 가해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아니, 꿈 속에서도 그를 증오했다. 평소 편두통을 앓고 있었던 가해자는 그 날 많은 양의 두통 약을 먹고 운전하다 정신을 잃고, 사고를 냈다고 한다. 찾아와 백 배 사죄해도 용서가 될까 한데 “미안하다”는 사과 한 마디 없었다. 다리를 절단한 부분에 통증이 오는 환상통으로 아내가 끙끙 앓는 밤이면 그를 찾아가 아내의 고통을 되돌려 주고 싶었다. 가해자측 영국 보험회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잊을 만하면 각종 서류를 요구했다. 2개월 이상 입원이 안 돼, 아내가 퇴원하면 “집에 있는데 왜 취업을 안 하느냐?”고 닦달했다. 취업은 고사하고, 입원도 어려운 국내 상황을 설명했지만 “OECD국가인 한국에서 그럴 리 없다”고 주장했다. 자다가도 분노 때문에 가슴이 벌렁벌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내게 말했다. “더 이상 그들을 미워하지 말자, 이제 용서할 때가 왔다”고 말이다. 아내는 자신의 불행과 고통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지만 나는 준비가 안 돼 있었다. 나도 용서를 다짐했지만 아내가 걷는 연습을 하다 넘어져 피를 흘리고, 제대로 발음조차 하지 못할 때 피가 거꾸로 솟았다. 하지만 시간은 미움과 고통을 잊게 한다. 미움도 시간 속에 서서히 사라져갔다. 가해자와 보험회사를 용서하고 나니 세상이 조금씩 다르게 보였다. 그러자 몇 개월 뒤 거짓말처럼 영국보험회사로부터 피해보상이 이루어졌다. 참 멀고도 먼 여정이었다. 그 날 아내와 집 근처 공원을 찾았다. 5월의 태양이 눈부셨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말했다. “8년 전 스코틀랜드 오지에서 우리가 겪은 사건은 삶의 뿌리가 뽑힐 만한 세찬 태풍이었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고, 이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자”고 말이다. 용서는 용서를 낳고, 좋은 일은 좋은 일을 낳는 것일까. 우리를 위해 수고한 두 변호사는 “이런 날이 오는군요”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수임료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지금도 혼수상태에 빠진 아내를 바라보며 눈물로 성모송을 바쳤던 순간이 생각난다. 아내를 위해 일제히 미사를 올렸던 유럽의 한인교인들, 병상에서 함께 기도했던 영국간호사들, 그리고 아내가 생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 우리부부를 향해 내밀어 준 수많은 따뜻한 손길을 잊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큰 고통을 주시고 아내를 살리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네가 몸소 겪었으니 어려운 환자를 위해 아름다운 병원을 세우라는 계시가 아닐까. 오늘도 나는 행복한 상상을 해 본다. 앞으로 세워지게 될 푸르메병원에서 자원봉사자로 나선 아내가, 삶이 힘들어하는 환자들에게 “나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고 “그래서 오늘을 맞을 수 있었다”고 말하는 모습을 말이다.
백경학 미카엘·푸르메재단 상임이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