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소망, 사랑 중에 으뜸은 사랑

만 40년 가까이 신앙생활을 해온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한국 교회는 사랑보다 믿음, 사랑의 성숙보다 믿음의 성장에 관해 더 많이 얘기한다. 교회 성장이 은연중 최대 관심사인 목회자들은 더욱 그렇다. “그 사람은 믿음이 참 좋다”는 말은 종종 들어도 “그 사람은 사랑을 잘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별것 아닌 듯 보이는 이런 습관적인 경향 때문에 한국 교회는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건 아닐까.

믿음과 소망은 무척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구체적인 내용이 천차만별이라 도대체 어느 게 정말 기독교적으로 ‘비교적’ 올바른 건지 분별하기 어렵다. 대다수 신자들은 예수를 잘 믿어 현세에서 영적 · 물질적 축복을 받고 죽어서 ‘천당’에 들어가는 게 마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양 착각하고 있다. 다분히 이기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이런 신앙 양태는 2천 년 전에도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나 보다. 바울로 사도가 저 유명한 ‘사랑의 장’에서 사랑의 위대한 특성을 길게 열거한 후에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 13,13)라고 결론지은 것은 당시의 빗나가는 신앙에 대한 준엄한 경고로 생각된다.

이 짤막한 구절은 ‘실천적으로’ 암시하는 바가 크다. 우선순위를 명백히 하라는 것, 즉 믿음도 중요하고 소망도 필요하지만 최고 가치는 딱 잘라 말해 사랑이라는 거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척해도 사랑이 없으면 ‘꽝’이라는 것, 기독교 신앙의 진정한 잣대는 다름 아닌 사랑이라는 거다.

이뿐만이 아니다. 바울로 사도는 갈라티아 교회를 향해서도 명쾌하게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입니다”(갈라 5,6).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 즉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니? 할례, 달리 말해 종교적 형식이 아니라 본질적 내용을 문제 삼아라. 겉모습에 사로잡히지 말고 알맹이에 충실하라. 대충 믿음으로 얼버무리지 말고 그 믿음이 사랑으로 실천되는지 철저히 검토하라. 그래서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에 대해서는 “죽은” 믿음이라고 가차 없이 사형 선고를 내리라는 거다(야고 2,14-26 참조).

물론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닦았고 부활의 소망을 품고 살았던 사도가 믿음과 소망의 중요성을 몰랐을 리 없다. 어쩌면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믿음은 나무뿌리와 같다. 소망은 하늘을 향해 쭉쭉 뻗는 나무줄기와 같다. 사랑은 사방으로 펼쳐지는 나무 가지와 같다. 나무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결정짓는 것은 뿌리다. 그래서 믿음이 더없이 중요하다. 그러나 뿌리만 있고 줄기와 가지가 없다면 나무가 아니다. 꼴불견이다. 그런 나무는 사랑의 그늘을 드리울 수 없다. 뿌리와 줄기와 가지, 이 셋이 균형 잡힌 조화를 이루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모습이다. 그런데 오늘날 믿음과 소망에 관한 논의만 무성하고 사랑의 실천에는 무관심하다. 그래서 나는 의도적으로 ‘으뜸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 안에, 하느님 안에

사복음서 중에도 유난히 사랑을 강조하는 요한 공동체의 작품인 요한 1서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 폭탄선언을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 4,16).

이 구절에는 안팎으로 신앙 공동체의 위기에 직면해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고민했을 요한 공동체의 깊은 자기 성찰이 담겨 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라는 진술은 인간의 사유와 관념 너머의 초월적 하느님을 들먹이기 일쑤인 전통 신학의 철저한 반성을 촉구한다. 하느님을 자꾸만 신비하고 난해하게 풀이하려 들지 말고 간단명료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거창하고 현란한 신앙고백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머리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뚜렷하고 실천적인 고백이 있어야 한다. 유식한 신학자들의 거대 담론의 조직신학이 아니라 평범한 신자들의 일상생활과 긴밀히 연결된 소박하면서도 실속 있는 생활신학이 요구된다는 거다.

그래서 요한 1서 저자는 앞의 구절을 더 알기 쉽고 적나라하게 풀이한다.

“누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1요한 4,20).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수없이 많다. 하지만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적다. 신앙고백은 넘쳐나는데, 고백과 맞닿은 사랑의 실천은 바싹 가뭄이 들어 오늘 한국 교회는 부끄럽게도 ‘신뢰성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명목상의 신자들은 헤아릴 수 없는데 그들 중 실질적인 신자들은 별로 없어, 오늘 이 땅에서 사랑의 하느님을 전하는 일이 날로 어렵고 한계에 부딪혀 있다.

솔직히 말해, 거창하게 한국 교회를 논하고 다른 사람들을 탓하기에 앞서 내 자신이 문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남들 보기에 그럭저럭 해내는 것 같지만, 결국 나는 “거짓말쟁이” 아닌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기 모순에 빠져 있으면서도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살아온 건 아닌가? “사랑 안에” 없어 “하느님 안에”도 없으면서도, 그래도 “하느님 안에” 있으니 그나마 퍽 다행이라고 자위하는 게 내 삶의 서글픈 자화상은 아닌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랑

사실, 한국 교회도 사랑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꽤 많이 이야기한다. 추상적인 믿음보다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더 강조하면서 예수의 삶의 발자취를 따르려 애쓰는 교회와 목회자들도 더러 있어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다. 그러나 대체로 한국 교회 신자들의 사랑은 교회 울타리 안에 갇혀 있거나 틈틈이 하는 ‘봉사’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총체적인 삶의 스타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한 부속물로서의 지엽적인 사랑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성경을 전체적으로 주의 깊게 살펴보면, 특히 복음서 속의 예수의 삶의 모습을 예의 주시하면, 참된 사랑의 의미가 아주 분명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최후 심판에 관한 거의 유일하게 상세한 보도인 ‘최후의 심판’(마태 25,31-46)을 보면, 놀랍게도 예수는 세상에서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혀 있는 이들과 ‘무조건적으로’ 동일시된다. 그래서 세상에서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마태 25,40.45)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판가름 난다.

물론 사랑은 동기가 순수해야 한다. 그래야 참된 사랑이다. 사랑이 심판의 궁극적 기준이니까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사랑도 나름대로 가치 있겠지만 아무래도 볼썽사납다.

무슨 대가를 바라는 사랑이 아니라 맘속에서 자연스럽게 샘솟는 동정(同情) 때문에 나도 모르게 행동으로 표출되는 사랑. 청계천 피복 노동자였던 전태일이 그랬듯이,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애간장이 타고 어떻게든 돕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인정(人情)의 사랑.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예수에게서 돋보였던 이 참으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래서 “신적”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이런 사랑이야말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사랑이다.

사랑의 주객(主客)이 따로 없이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바로 그런 사랑이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 받는 사람 모두를 똑같이 구원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 마더 데레사나 영화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이태석 신부의 삶이 종교 유무를 떠나 많은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것은 그들의 사랑이 유별나게 ‘기독교적’이어서가 아니라 꾸밈없이 소박하고 인간적이고 겸손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한국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손가락질을 받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뼈아픈 진단이 내려지고 있지만, 아직 한국 교회에 희망은 있다. 하느님과 예수를 믿고 영혼 구원과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이 땅의 평범한 신자들의 그 뜨거운 믿음과 간절한 소망이 작고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진다면, 바로 이게 신자들이 진정으로 거듭나고 새 생명을 얻는 길이요, 한국 교회의 참된 갱신이며 실질적인 종교개혁이 될 것이다.

죽어서 심판의 기준을 통과해 천국에 들어가려고 마지못해 하는 사랑이 아니라, 굳이 종교적으로 포장할 필요도 없이 순수한 인간적 동기에서 자발적으로 기쁘게 하는 사랑. 그저 내가 매 순간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하게 되는 사랑. 비록 아주 작고 볼품없어도 진심이 듬뿍 담긴 사랑. 그래서 내 소박한 사랑의 모습을 보고 주변 사람들도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드는 그런 사랑을 실천할 잠재력이 이 땅의 신자들에게는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한다.

내 맘속에 그분이 계셨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너무 높은 곳, 너무 멀리에서 찾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의 삶 또한 사랑에서 멀어지는 때가 많았다. 하루 세 끼 밥을 먹고 무의식중에 공기를 호흡하듯이 사랑도 매 순간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건데, 사랑이 마치 ‘심판’이라는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지겨운 숙제나 공부처럼 되어버렸다. 하느님은 사람 안에, 바로 너와 내 안에 계신다고 예수는 몸소 가르쳐 주었는데, 이걸 깊이 깨닫지 못해 우리의 삶은 거룩함과 사랑에서 멀어져 추하고 천박해졌다.

13세기 페르시아 이슬람교 신비주의 시인 잘랄루딘 루미는 자신의 오랜 신앙 편력을 간단히 요약했다. “나는 신을 찾아 여러 곳을 돌아다녔어도 찾지 못했는데,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니 그분이 거기에 계셨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말했다. “하느님을 찾기 위해서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혼자 머물러,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거릿 크로퍼는 ‘경배’라는 짧은 시에서 나지막이 말한다. “인간의 머리 속에 있는 하느님의 생각,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 인간의 몸 속에 있는 하느님의 고통을 나는 경배합니다.”

이 몇 가지 실례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는 퍽 소중한 깨달음을 얻는다. 진실로 하느님을 찾으려거든 무엇보다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보는” 깊고 조용한 자아 성찰이 필요하다. “인간의 머리 속에 있는 하느님의 생각,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 인간의 몸 속에 있는 하느님의 고통”을 감지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을 참으로 경배하는 일이다. 바로 “내 마음속”이 하느님의 거처요, 바로 내 “생각, 사랑, 고통”이 하느님을 만나는 통로다. 내가 좋은 생각을 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할 때, 내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신다.

아니, 하느님이 어디 사람 안에만 계시겠는가. 감리교 목사요 시인인 한희철은 목련과 벚꽃에서도 살짝 그분의 모습을 본다. “뒤뜰엔 함박눈 같은 목련 / 길가엔 싸라기 같은 벚꽃 / 세상 아름답다고 / 사랑하며 살라고 / 두 팔 마음껏 벌리시는 이가 있으니.” (‘어느 날’)

이런 영성가들을 마냥 부러워만 할 게 아니다. 나도 영적 눈이 활짝 뜨이면 세상 도처에서 그분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게다. 긴긴 겨울의 터널을 지나 봄꽃들이 막 꽃봉오리를 터뜨리려는 이때, 내 맘속에도 사랑이 싹트기를! 그래서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기를!

나는 아직 신이 아니다

사람들은 나를 어르고 달래며
“당신이 진짜 신”이라고 우겨도
나는 아직 신이 아니다

아무리 애써도
벗어날 길 없는 고통으로
눈물 흘리는 이들이 있는 한
나는 아직 신이 아니다

세상 부귀 영화 명예와 권세
다 나를 위해 버리겠노라 다짐해놓고
정작 신의 이름으로 출세하려는 자들이 있는 한
나는 아직 신이 아니다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제 목숨 스스로 끊고 마는
한 맺힌 이들이 있는 한
나는 아직 신이 아니다

끝없이 욕망을 부추기며
오로지 제 욕심 챙기기에 급급한
맘몬 숭배자들이 있는 한
나는 아직 신이 아니다

내놓을 것 하나 없어
기 펴보지도 못한 채
날마다 눌려 사는 이들이 있는 한
나는 아직 신이 아니다

나를 사랑의 신이라 칭하면서
제 왕국을 건설하고자
신의 이름으로 살인하는 자들이 있는 한
나는 아직 신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아직 신이 아니다
그대들이 아무리 나를 신이라 해도
나는 아직 신이 아니다
아직은.

(이종록, 한일장신대 구약학 교수)
 

정연복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읽는 성서>, <함께하는 예배>, <오늘 우리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신 예수> 등을 쓰고 <신비주의 신학>, <아메리카, 파시즘, 그리고 하느님> 등을 번역했으며 <한국의 기독교 명시>, <세계의 기독교 명시> 등을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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