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3주년 기념으로 기대 하십시요 개봉박두 3월달 후리홀드 구역모임에서 - 바보야.
작성자:
송상준 베드로         3/2/2012
내용:

 

 

 

 

 

김수환 추기경 전기 다큐멘터리 <바보야>를 위해 국민배우 안성기가 나섰다.
국민배우라는 수식어와 함께 '국민 내레이터'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얻었을 정도로 <북국의 눈물>을 비롯해 수 편의 다큐멘터
리에서 내레이터로 참여한 바 있는 안성기의 목소리가 또 한번 관객들의 마음을 울릴 예정이다.

1957년 영화 <황혼열차>로 데뷔 한 그는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와 모범적인 행동가짐으로 전 세대를 아우르는 인기를 얻으며
국민배우라는 칭호로 불려왔다.

<화려한 휴가>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실미도> 등 국내 영화사에서 빠질 수 없는 주요 작품에서 극의 중심을 잡는 굵직한
연기를 선보이며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감을 발휘하는 배우다.



평소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김수환 추기경의 동성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한 안성기는 <바보야> 제작진의 내레이터 제의에
한치의 망설임 없는 승낙과 더불어, 뜻 깊은 다큐멘터리에 참여하게 된 것에 대해 영광의 뜻을 표했다.

놀라운 집중력과 내레이션 베테랑다운 관록으로 예정된 작업 시간 보다 빨리 완벽한 내레이션을 녹음한 안성기는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그리움을 표해 제작진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는 후문이다.
 

그 해 겨울, 눈이 많이 내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2009년 2월 16일 오후 6시 12분. 그는 명동성당을 떠났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던 그의 긴 기도소리만 명동을 떠돌았다. 추기경의 선종 후 각종 보도 매체를 통해 알려진 장례 절차와 다시금 전해지는 추기경의 인생은 많은 사람에게 충격이자 놀라움이었다. 해가 뜨는 새벽부터 한밤의 자정까지 사람들은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명동성당으로 향하는 수많은 발걸음, 그들 모두가 신자는 아니었다. 앞 못 보는 이들을 위해 두 눈을 남기고 떠났음에 감동한 사람들,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추기경이 보여준 범종교적 사랑을 나누고픈 신자들, 자신의 성공보다 약자를 위해 살다간 이 시대 어른의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함께 찾은 부모들까지.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라는 김수환 추기경의 마지막 메시지는 모두에게 거대한 울림이 되었다. 평생을 사랑하고도 마지막까지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사랑이었다. 신 앞에 엎드릴 때부터 떠나는 날까지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을 꿈꾼 김수환 추기경. 그는 스스로 바보라 불렀다. 하지만, 그 바보는 믿음이 척박한 땅에서 추기경이 되었고 누구도 나서지 않을 때 용기를 냈으며 우리 곁을 떠나는 날까지 이웃 사랑을 실천한 기적의 삶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의 일생이 담긴 다큐멘터리 영화 <바보야>는 이 세상 무엇보다 아름답게 빛났던 그의 삶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다시금 일깨워 줄 예정이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된 종교 지도자로서의 삶뿐 아니라,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국 역사의 산 증인으로 살아 온 인고의 삶까지, 김수환 추기경의 모든 것이 담긴 다큐멘터리 <바보야>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그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순간을 선물할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 5월 8일, 순교자 집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그는 학교를 졸업한 뒤 자립하게 되면 따뜻한 가정을 이룬 장사꾼이 되는 소박한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의 엄격한 홀어머니는 그가 그의 형제들과 같은 사제의 길을 걷기 바랬다. 1933년 대구 성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된다. 나라의 독립을 가슴 뜨겁게 열망하던 김수환은 황국신민의 소감을 묻는 시험문제에 학교에서 쫓겨날 것을 각오한 채 “나는 황국신민이 아니다”라고 적지만, 그는 이것을 계기로 예상치 못한 일본 유학 길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식민지 청년으로서 군대에 징집되는 고초를 겪게 된다. 타국에서 맞이하게 된 죽음의 문턱에서 떠오른 단 하나의 생각은 ‘어머니의 무릎에서 죽고 싶다.’ 였다. 깊은 사모의 정을 체험하고 어렵게 귀국한 김수환 앞에 펼쳐진 길은 어느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고독한 사제의 삶이었다. 그렇게 평범한 가장, 나라를 위해 싸우는 독립운동가의 삶은 잊어야만 했다. 1951년 9월 15일,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았던 사제 수품식에서 옹기장수의 막내아들은 비로소 하느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어머니의 권유로 13살에 신학교에 입학한 후 18년이 흐른 뒤에야 신 앞에 엎드리게 된 김수환 추기경은 사람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낮고 겸손한 부복(俯伏)의 자세로 신의 은총을 빌며 사제 김수환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세속의 아들로 태어나 사제가 된다는 건 곧 순교의 길을 걷는 것과 같다. 한 평생 정결과 청빈과 순명을 서약하는 그 길은 고독과 싸워야만 하는 기나긴 길이었다.

1987년 6월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 사회 정의를 외치는 학생들이 명동성당 안으로 몰려들었다. 그 해 전두환 정권은 4,13호헌조치를 발표하고, 통일민주당의 창당을 방해하는 등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억압하고 장기집권을 획책했다. 한편,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은폐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재야와 통일민주당은 연대하여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전국적 민주화투쟁의 구심체로 결성했다. 6월 10일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를 개최하여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같은 날 민주정당 대표의원 노태우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전두환 정권을 간선제 호헌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급격히 확산됐다. 15일까지 명동성당농성투쟁, 18일 최루탄추방대회, 26일 민주헌법쟁취대행진에 이르기까지 20여 일간 전국적으로 500여 만 명이 참가하여 4?13호헌조치 철폐, 직선제개헌 쟁취, 독재정권 타도 등 반독재민주화를 요구했다. 이 같은 시위 과정에서 정부는 김수환 추기경에게 최후의 성소와 같았던 명동성당을 무력으로 점거하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바쁜 일과를 마치고 늘 마음 졸이며 잠들지 못한 채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던 그는 수화기를 들고 이렇게 이야기 했다. “당신들은 나를 밟고, 우리 신부들도 밟고, 수녀들도 밟고 나서야 학생들하고 만날 수 있다.”

피로 얼룩진 역사에 투영된 김수환 추기경의 일대기는 분명 우리가 공유하고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그의 존재는 부당한 권력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힘없는 민중에게는 더할 수 없는 위안이자 안식처였다. 김수환 추기경, 그는 한국사의 가장 뜨거운 격동기 시절 종교를 넘어 사회의 가장 큰 어른, 약자들의 울타리, 마지막 대변인이었다. 누군가는 그에게서 예수의 모습을 봤다고 말한다. 또 누군가는 그가 위대한 지도자였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그의 모습을 스크린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온 나라가 앞으로 내달리기만 해야 했던 우리의 70, 80년대. 인권의 개념은 자리 잡지도 못했고, 성장의 그늘 어딘가에서는 늘 구멍 뚫린 인권의 사각지대가 불거질 수밖에 없었다. 매매춘 여성들이 조그만 쉼터를 마련하던 날, 추기경은 그곳으로 향했다. 어느 누구도 함께 밥 먹는 것 조차 꺼려하던 시절, 추기경은 정초마다 그 곳을 찾아 함께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술에 취한 여성이 자신에게 “아저씨~”라고 불러도 아무 말 없이 웃어 주며 그들의 진정한 ‘아버지’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성당을 다녀본 적도 없고 추기경이 뭔지도 모르던 그녀들, 그녀들이 영원히 잊지 못하는 한 순간이 있다. 한 여성이 세상을 떠나던 날의 이야기다. 소외 받은 삶을 살았던 한 여성의 죽음 앞에 추기경은 한 달음에 병원으로 달려왔다. 추기경이 죽음 앞에 조문을 하고 장례미사를 집전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그 당시 매매춘 여성의 죽음 앞에 흘린 추기경의 눈물은 그녀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름 조차 모를, 가족들 조차 외면했던 그녀들을 진정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추기경은 그녀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그녀들의 고민상담에 단 한번도 “고생하지 말고 당장 그곳을 그만둬.”라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고생했구나, 많이 힘들었겠구나.”라며 그녀들을 진심으로 위로해 주었다.

서산에 노을이 물들면 고향집이 떠오른다던 사람, 김수환 추기경. 가난하지만 평화롭던 그 고향집이 그가 꿈꾸는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았을까? 그 자신이 우리의 고향이었다는 걸…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기까지 70년이 걸렸다고 겸손히 말하는 김수환 추기경. 모든 사람들을 아무 조건 없이 온전히 사랑해준 그의 바보 사랑은 영원히 우리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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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 교리서
226 유일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해서 그것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 것이면 선용하고 하느님께 등을 돌리게 하는 것이면 멀리하도록 해 준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저를 당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것을 거두어 가소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저를 당신께 가까이 가게 하는 모든 것을 주소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저를 당신께 온전히 바치기 위하여 저 자신을 버리게 하소서.”(플뤼에의 성 니콜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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