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여 년간 번역한 책을 손꼽아 보니, ‘성모님을 만난 성인들’, ‘죄인들의 성인들’, ‘파티마 십자군’ 잡지 한 권, ‘레지오 선교사 알피 램’, ‘요한복음 해설서’ 등 다섯 권이다. 모두 신부님이나 가까이 지내는 성당 교우의 부탁으로 겁 없이 번역한 것이라 모두 성인전 아니면 가톨릭 신앙에 관한 책이다.
출판을 염두에 둔 게 아니라 참고용으로 생각했기에 번역이란 걸 단시간에 뚝딱 해치워서 나중에 시간 날 때 살펴보면 오역이나 오자와 탈자가 적지 않아서 혼자서 얼굴을 붉히곤 했다. 보수를 받지 않고 극소수의 독자만을 대상으로 번역한 책이라서 마음의 부담 없이 손댄 거지만 그래도 부끄럽다. 만약 내 번역이 몇몇 신자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주었다면 나도 하느님 사업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하였을 거라는 자부심을 느낀다.
번역을 마치고 나면 초고를 의뢰인에게 전해 주고 주마간산 격으로 교정을 본다. 오자와 탈자를 바로잡고 어색한 표현을 바로 잡는다. 그리고 다섯 권 정도를 미국 출판사에 의뢰하여 책으로 묶고, 두 권은 보관하고, 두어 권은 의뢰인이나 신앙심이 깊고 허물없이 지내는 사람들에게 준다.
10년 전에 인도 뭄바이 대교구의 알반 구디어 대주교가 쓴 ‘죄인들의 성인들’이라는 책을 번역한 적이 있었다. 비교적 덜 알려진 성인들을 소개한 책이라 대부분 처음 들어보는 성인이었다. 영문 원본이 160쪽 정도밖에 안 되는데도 번역에 너덧 달이 걸렸다. 문체가 만연체에 가깝기도 하고, 20세기 초반에 쓴 글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표현 방식이 장중해서 번역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머리는 아팠지만, 문장이 아름다워서 번역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고 몇 년 지나서 이 번역본을 다시 읽어보니 어떤 성인들은 나만큼이나 죄가 크거나 나보다 훨씬 더 큰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 책을 잊고 지내다가 얼마 전에 생각이 나서 다시 읽어보니 이번에는, 죄가 컸던 그들이 철저히 회개하는 과정이 인상 깊었다. 새삼 참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 혼자 보더라도 제대로 번역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꼼꼼하게 살펴보며 세 번이나 교정을 보았다. 번역상 오류와 오자와 탈자를 바로 잡고 번역 투의 문장을 다듬어서 전과 같이 딱 다섯 권만 책으로 묶을까 한다.
이 책에 소개된 성인들은 다음과 같다.
용병과 떠돌이 노름꾼 노릇을 번갈아 하다가 거친 행동과 악습을 버리고 병든 이들을 돌보는 수도회를 창설한 성인
지능이 떨어지고 병약하여 가족에게도 버림받았으나 위대한 치유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단순함과 겸손함의 모범이 된 성인
제멋대로 행동하고, 음욕에 빠져서 평판이 나쁘던 미녀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허영을 버리고 가난한 생활을 하며 철저히 참회한 성녀
머리가 뛰어난 귀족 출신으로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교사가 되었으나 실패만 거듭한 성인
세속적 쾌락을 추구하던 바람둥이가 천상 행복을 추구하려고 회심하여 교회에서 손꼽히는 위대한 신학자가 된 성인
이 밖에도 흠 많던 영혼이 그걸 극복하고 완전하게 된 성인들
이 성인들을 보니 하느님이 포기하실 만큼 죄 많고, 보잘것없고, 비참한 인간이란 없다는 걸 알게 되어 용기를 얻게 된다. 죄 많은 인간이지만, 이제부터 노력하면 나도 성인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이 책을 쓴 목적이 아닐까 싶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적인 허물을 덮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인을 부르러 오신 게 아니라 약하고, 어리석고, 죄 많은 인간을 성인으로 만들기 위해 오셨다. 그러기에 성인들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들의 허물을 덮어줄 수도 있음을 깨우쳐 주는 분들이라는 사실, 위대한 성인들조차 우리가 극복하기 어려워하는 끈질긴 악습, 육체적인 유혹 그리고 영적인 메마름과 투쟁해야 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서평에서 번역 인용.)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1 코린토 1:2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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