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우리는 흔히 육신의 생명 만을 그 기준으로 두게 됩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명이 가득하면 살아있는 사람이 되고 반대로 육신의 생명이 꺼져가는 죽은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의 내면에는 전혀 다른 생명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혼의 생명이지요. 그리고 이 영혼의 생명에 의해 우리의 영원한 삶과 영원한 죽음이 구분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신은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서 손상되고 위협 당합니다. 마찬가지로 영혼도 크나큰 영적 질병이나 크나큰 사고를 통해서 손상돼서 위협 당합니다. 이 질병은 악습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사고는 죄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어도(실제로는 죽지 않지만 거의 죽은 상태로 머물러도) 육신은 여전히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영혼에 커다란 죄악을 지니고 살아도 육신을 신경써서 열심히 보살필 수 있습니다. 생기있는 육신으로 더 큰 죄악을 저지를 수도 있는 셈이지요. 그래서 외적인 것에만 치중하기 쉬운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에 생기가 있는지 없는지, 혹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타인의 영혼이 살아있는지 손상되어도 있는지 쉽게 구분해 내지 못합니다. 따라서 '위선'과 '가식'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요. 즉 죽어있는 영혼의 상태로 타인들에게 다가와서 '선한 영혼'을 가장하는 것입니다.
영혼이 죽은 사람은 영혼에 생기를 지닌 사람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그들은 어둠과 불행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남들도 똑같은 상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남들의 행복을 견뎌내지 못하지요. 그들은 언제나 투덜대고 비판적이고 부정적입니다. 죽은 영혼에서 나오는 당연한 반응인 셈이지요.
또한 그들은 지극히 피상적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영적 샘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명의 샘을 마실 수 없기 때문에 지극히 피상적인 것들에 집착합니다. 좋은 구경거리, 값비싼 물건들,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소식들을 서로 나누는 것이 그들의 대화의 전부입니다. 그들은 결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회칠한 무덤과도 같아서 썩어있는 속을 드러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대화는 절대로 깊이를 지닐 수가 없습니다.
그런 죽어있는 이들의 일들은 죽어 있는 이들에게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생명에 대한 갈망을 지닌 이들에게 다가서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생명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물론 죽음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이들을 생명으로 데려와야 하지만 아무런 의지도 없는 이들을 억지로 끌어 오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들의 허망한 일들에 모두 개입하고 간섭하다가는 우리의 소중한 사랑과 의지를 모조리 헛된 일에 허비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갈라 5,16-17)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루카 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