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의 전례력으로 연중 시기는 모두 34주간입니다. 오늘은 연중 34주일이기에 교회의 달력으로는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이 되며, 다음 주일은 대림 제1주일로서 새해가 시작됩니다. 교회는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인 연중 34주일을 언제나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지내왔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에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고백해 온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를 보면,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2사무 5,3) 기름을 붓는 행위는 그 사람을 거룩하게 한다는 표시입니다. 거룩함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kiddushin’이라는 단어는 ‘떼어놓다, 따로 구별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구약의 오랜 전통에 따라 임금이나 예언자를 뽑아 세울 때는 언제나 그 사람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면, ‘예수님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결국 예수님이야말로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며 임금이시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유대인들이나 이슬람교인들이나 비신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냥 한 인간 예수일 뿐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우리에게 그리스도 왕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콜로 1,15.17-18)

 이 말씀 그대로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생겨났고, 예수님 안에서 존속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작이고 마지막이시며, 만물의 으뜸이시기에 왕이며 임금님이십니다. 그분은 만물의 주인이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온 백성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실 때,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라고 하며 빈정거렸고(루카 23,35), 로마 군사들도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루카 23,37)라고 말했습니다.

 이 빈정거림과 조롱이야말로 예수님이 진정한 왕이라는 사실을 더 드러나게 해 줍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구원하였으면서도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셨던 분, 한평생을 남들을 위해 사셨으면서도 자신의 삶과 목숨은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어놓으신 분,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으며,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 분’(필리 2,6-8)이 바로 예수님! 우리를 위한 진정한 임금님이십니다.